고은 깊은 곳
고은.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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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인 고은과 소설과 김형수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김형수 작가가 질문을 던지면 고은 시인이 그에 대한 대답을 하며 책을 구성하는데, 질문과 대답이 상당히 무게감 있다. 일제 시대의 겪었던 고통과 아픔이 고은 시인의 무덤덤한 대답을 통해 전달되며, 그 속에서 고은 시인이 '우리 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세종대왕을 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힘든 시간 속에서도 꿋꿋한 절개를 지니고 생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몇 문장만으로 구성된 그의 시가 어찌 그렇게 무게감 있고 많은 의미를 내포할 수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고은 정신은 끝없이 세계의 원본과 마찰하면서 문명과 체제의 반대편을 유랑하다. 시인이 바람과 별빛과 사람의 숨결에 접촉하면서 남겨놓은 이슬 같은 낱말들이야말로 한국의 감수성이 지상에 미치는 파급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역설하는 물증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대담이 한낱 명사의 한담이 아니라 고은 특유의 현란한 상상력과 아포리즘이 가득한 '말의 춤'을 선보이는 구변 문학의 향연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게 되었다.
- 김형수

 

이 책에서 단 한 줄도 우스갯거리로 읽을 부분이 없었다. 고은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 모든 아포리즘에서 단 한치의 흐트러짐도 느낄 수 없었고, 모든 문장이 간결하고 고결했다. 그래서 어쩌면 얇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어렵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대답에 진실함이 담겨있었고, 그 대답을 존중하는 질문자의 태도도 느낄 수 있었다. 

156p, 김형수가 질문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만흔 글을 쓰게 하는 걸까요?" 고은은 파도, 바람을 꼽으며 이야기 한다. 1960년대 3년간 제주도에 살 때 사라봉 옆 별도봉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의 그 필사적인 율동이 본인 시의 율동으로 이입된 체험을 잊을 수 없다고. 나는 반가웠다. 얼마전 제주도에서 내가 예전에 걸었던 기억이 참 좋아, 굳이 찾아가서 또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역시 좋은 길, 좋은 장소는 누구에게나 열리고 통하는 법이다. 

 

나에게서 시를 빼앗으면 나는 뱀 허물이고 거미줄에 걸린 죽은 풍뎅이 껍질이지. 내 묘비에는 내 이름 대신 '시'라는 한 자만 새겨질 것이네. 그리고 그 아래에 (1933~)이 작은 글씨로 새겨질 것이네.(22p)

기억은 상상에 속하는 잠복기 말고 그것에 거역하는 또 하나의 유전자를 낳는지 모른다네. 하지만 기억은 어디까지나 객관이 아니네. 그것은 가공되는 것이네. (26p)

직관은 고칠 수 없는 것이고, 서술과 묘사는 그 과정에서 창조적 단서를 얻지. 시는 즉흥과 수련 두 가지가 작동하는 동시 행위 또는 석차 행위이네. 그래서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딱 갈라놓으면 시는 죽어. 시 분석이 위험한 것은 그 분석의 절단으로 생명이 도살되는 까닭이네. 뱀을 토막 치면 뱀은 죽지 않는가.(125p)

김형수 : 좀 엉뚱합니다만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이 요즘 세대에게 많이 회자됩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은 : 이제 올라갈 때도 보고 싶네. 오후는 오전보다 훨씬 회한이 많지. 그때 인간은 참다워진다네. 나는 오후를 좋아하네. 지혜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지. 온갖 시련의 답인 것이네.(158p)

 

이 책을 읽고 난 후 고은 시인의 시집을 다시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보다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그의 시집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가을날, 가벼운 무게감이지만 내용은 결코 허투루 대할 수 없는, 또한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책을 한 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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