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 필사 - 고종석이 가려 뽑은 생각의 문장들
고종석 지음 / 로고폴리스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편리한 시대다.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아도 단축버튼만 누르면 아니, 소리로 외치기만 해도 음성인식으로 전화가 연결된다. 메모지와  필기구를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대형 쇼핑몰 주차장에 가면 기둥에 친절한 안내가 보인다. "주차한 곳 번호 사진을 찍어 가세요." 이런 더없이 편리한 시대에, 글자를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카페에서 일렬로 펼쳐진 노트북의 모습을 보는 게 낯설지 않다.  
 이런 시대에 필사라니, 뜬금없을수도 있다. 그런데 필사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의외로 높다. 생각해보면 이런 인기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배움(학습)에 있어 너도나도 효율과 편리를 외치지만 내 손으로 직접 꾹꾹 눌러쓴 필기(필사)만큼 효과가 확실한 게 어디있을까. 어쩌면 가장 고전적이고 원론적인 방법이 베스트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필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10 문장 내외의 글을 외워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휴대하기 쉽게 10 문장을 노트에 베껴 쓰게 되었다. 사진을 찍으니 편집도 힘들고, 문장 배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열 문장이니 부담없이 적어보게 되었고 적다보니 문장에 좀더 집중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뒤로 나는 영어 문장을 노트에 베껴쓰는 연습을 종종 하게 되었고, 이왕이면 좋은 글을 필사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고종석의 "필독, 필사"는 이런 의미에서 매우 적절해 보였다. 사실 필사할 책을 막상 찾아보니, 어느 한 책을 필사하기엔 자신도 없었고 고르기도 쉽지 않았다. 이 책은 저자가 '가려 뽑은 생각의 문장들'을 실어놓았기 때문에 다양하고 괜찮은 문장을 '당장' 접하고 싶었던 나의 요구와 잘 맞았다. 게다가 저자는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한 기자, 논설위원 출신이라 문장에 대한 감각이 남다를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실제로 저자는 서문에 이 책에 실린 문장들은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인상적인 것들을 옮겨 놓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다섯 장으로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모두가 행복해지기 전에는 아무도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 두 번째: 세상의 지식은 세상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세 번째: 발화가 없는 곳에는 참도 거짓도 없다, 네 번째: 유령 하나가 유럽을 떠돌고 있, 다섯 번째: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문학을 좋아해서인지 다섯 번째 노트가 유독 관심이 갔다.


  필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한번 쓴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써보고 또 써보고,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외우고 또 외우고..이런 작업들이 함께 이루어져야 그 의미를 더욱 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저자도 밝혔듯이 단 열개의 문장이라도 외워 자기 몸의 일부로 삼으라고, 그러면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이 문장들을 뽑은 의도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저자의 조언을 길잡이삼아 이 문장들을 거듭 보다보면 좀 더 다른 나,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진 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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