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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평점 :
김선영의 『시간을 파는 상점』
출판사 자음과 모음에서 주최한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 『시간을 파는 상점』이다.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무겁지 않고 명랑하면서도 날카로운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시간'은 근대적 의미에서 과학적으로 재단되고 계산되는 시간의 개념과는 다르다. 시간은 각각의 개인들이 각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무한하게 늘여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 시간과 장소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분절화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와 방식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분절되고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각 사건과 기억들을 어떻게 연결짓느냐, 또 그것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느냐에 따라 시간은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어느 한 순간의 시간에 멈춰버리는 것은 아닐까? 정이현이 작년 수돗가의 햇살 속에서 그대로 멈춰 있고, 난주가 정이현을 처음 봤을 때 심장이 벅차올랐던 그 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듯이. 그리고 엄마가 아빠와의 추억에 늘 머물러 있듯이."
"크로노스 : 우리의 시간은 현실 속에서 시계로만 재단할 수 있는 것 외에 그것르로 재단할 수 없는 것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를 들면 상상 같은 거 말이에요. 아니면 추억도 현실 속의 시계로 재단할 수 없지만 우린 분명 그때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잖아요. 음ㅡ 이런 말도 있어요. 좀 어려운 말이긴 하지만, "그때 그 시간과 장소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면 시간은 당신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 상상, 추억, 기억, 이런 것들은 지금 내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아니지만 분명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것이 분명해요.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있기에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거거든요."
주인공 온조는 인터넷을 통해 시간을 파는 일을 한다. 그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 것인데, 대신 반드시 의미있는 일만 의뢰받는다. 고등학생이 시간을 파는 일이라면 뭘까? 단순히 생각하면 그건 공부에 관련된 일일 것만 같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나 6시간만 살게"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우리 나라 고등학교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온조는 반드시 의미있는 일만 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일은 안된다. 실질적으로 시간을 양도하는 게 불가능하기도 하니까 그런 식은 아니다. 그래서 온조가 하는 일은, 누군가 훔친 물건을 다시 주인에게로 돌려놓는 일이나 오랫동안 만남을 피해왔던 누군가의 할아버지를 대신 만나 이야기를 전하는 일 등이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 온조, 그리고 온조에게 일을 의뢰하는 의뢰자들은 참으로 예민한 친구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거나 외면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 더 깊이 아파하고 조금 더 걱정하는, 인생을 아주 조금 더 예민하게 사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참 예쁘다. 남의 일을 함께 아파해주고 고민해주는 이런 동료들이 많다면 청소년들의 삶이 조금은 덜 고달파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책은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각자에게 다르게 주어지는 주관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을 이해하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진실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가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나에게 있어 카이로스의 시간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으면, 가끔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많이 흘렀을 때가 있다. 그런데 "책에 빠져있다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네" 라고 생각하기엔 그 책에 집중해있는 동안 나의 사고는 무한한 거리를 달려온 것처럼 오랜 시간을 누렸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한 단어 한 단어를 공들여 쓰고 또 고쳐 쓰는 동안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경험했고 많은 것을 느낀다. 이런 경험도 있지 않은가. 가끔 공상의 끝에 어떤 기억으로 닿으면, 갑자기 그 때 그 순간의 날씨와 분위기가 내게로 훅 밀려들어오는 순간이. 과거가 현재로 온 것인지, 현재가 과거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때때로 나는 분간할 수 없음을 느낀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의 의미다.
김선영 작가는 들뢰즈의 시간에 대한 철학이 긴 여운을 주었다고 했다. "현재란 결국 과거가 되어버리는 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을 그러한 점을 죽 늘어놓은 직선처럼 상상한다. 어떠한 현재도 과거와 함께 있으며 과거와 동시에 있기에, 사실 현재는 단순히 현재로서 생동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란 이미 언제나 현재와 과거의 복합체이고 결정체이다. (……) 기억을 단순히 지나간 약해진 지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는 결정적으로(본성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 지각의 각인과 잔상이 아니라 무한한 과거의 연쇄와 상호 침투로 이루어져 있다. 지속으로서 생동하는 시간에서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현재가 아니며, 현재는 결코 과거와 단절되어 있지 않다. 현재와 과거는 절대로 동시적이며, 현재란 상호 침투하고 상호 연쇄하는 잠재적 과거의 집적인 선단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이 아니다. 과거는 완전히 지나버린 이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거에 내가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는 과거의 일이지만 동시에 지금 현재의 일이며,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에게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날의 실수와 실패, 상처 혹은 모든 아픈 것들은 이따금씩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럴 때, 의연한 척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혹은, '그땐 그랬지' 하면서 넘겨보려고도 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는 걸 우리는 종종 느끼지 않나. 하지만 그때 그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혹은 그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들은 오히려 나를 더 두렵게 하기도 한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더 많은 시간들을,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더 잘 살아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서일까. 그래, 책임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묵직하게 내 마음에 내려앉은 것은 바로 책임감이다. 내 시간을 조금 더 나답고 의미있게,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자기 계발서보다 더 큰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