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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스페인
곽작가 지음 / 역사트레킹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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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재밌게 스페인을 알아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참~ 지도가 많은 것도 정말 좋더라고요!
스페인 입문서로 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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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곽작가 지음 / 역사트레킹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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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으로 서울을 여행하다니! 더군다나 역사라는 테마로... 무척 흥미로운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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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전집 1 - 소설 다시 읽는 우리 문학 10
김유정 지음 / 가람기획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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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가 김유정은? 먼저 소설 「동백꽃」과 「봄∙봄」이 떠오를 것이다. 또 두드러진 해학과 토속적인 문체가 다음을 이을 것이다. 거기서 끝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김유정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왜? 거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김유정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동백꽃」과 「봄∙봄」의 작가로, 또는 해학과 토속적인 문체의 소설가로 김유정이 ‘박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수식어로 김유정을 묶어두기에는 그의 작품세계가 그렇게 단조롭지 않을뿐더러 그의 사상을 담아내기에도 역부족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김유정은 교과서에서 던져준 몇 개의 단편적 지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동백꽃과 봄∙봄 이외에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김유정이 그거 밖에 내세울 게 없을까?



♥ 김유정역과 실레마을

2004년 12월 1일. 우리 철도 역사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 벌어졌다. 경춘선 신남역이 김유정역(驛)으로 개명을 한 것이다. 특정인의 이름을 딴 역사 명(名)은 처음인데다, 그 인물이 김유정이란 30년대를 풍미한 걸출한 소설가라는 사실이 세간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개명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는 했지만 김유정역은 분명 시골 간이역이다. 역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들이 아담한 농촌 촌락이라 거주 인구가 적기 때문이리라. 그 소박한 간이역을 빠져나와 약 10분 간 걸으면 김유정 문학촌에 당도할 수 있다.

그 곳이 바로 김유정이 태어난 실레마을이다. 경춘선 코스가 그렇듯 실레마을도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 아름다운 풍광이 김유정의 창작열을 자극시켰을 것이라는 건 쉽게 추측 할 수 있겠다.

약 30여 편에 이르는 김유정의 단편소설들의 상당수가 그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레마을이 전형적인 강원도 농촌인 터라 남도 지방의 평야지대와는 다른 토지 이용이 이루어진다. 즉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아내」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빈농들은 겨울 산에서 나무를 해와 가지고, 그걸 장에다 팔고 조나 옥수수로 연명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동백꽃」의 ‘나’와 점순이가 함께 ‘찐하게 쓰러진’ 장소도 산길을 타고 올라가야 있었고, 「만부방」에서 노름꾼들이 투전을 벌이던 장소는 인적이 드문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환경은 김유정 문학에 토속성과 해학성을 빼놓을 수 없는 기반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즉, 산골짜기 촌동네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설로 옮기다보니 토속성과 해학성이 기교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에 녹아서 분리할 수 없이 융합됐다는 것이다.


▲ 김유정 문학촌 전시관

ⓒ2005 곽동운




♥ 「동백꽃」과 「봄∙봄」을 넘어서

「동백꽃」과 「봄∙봄」은 김유정의 뛰어난 역량이 드러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아니라고 감히 말해본다. 「동백꽃」과 「봄∙봄」이 김유정의 대표작이 아니라니! 본 기자는 무슨 근거로 ‘코페니쿠스’적인 선언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 우리가 몰랐던 김유정이 있다. 김유정은 약 30편의 단편소설과 10여 편의 수필을 발표한다. 작품 활동 기간이 약 4년이었던 점, 그 기간동안 잦은 병치레를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작을 한 셈이다.

나는 여기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일단 김유정의 작품들을 열거해보자.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금따는 콩밭, 노다지, 만무방, 산골, 동백꽃, 아내, 가을....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작품 태반이 자신의 고향 실레 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동백꽃」과 「봄∙봄」은 산골마을의 순박한 처녀ㆍ총각의 사랑이야기가 주된 테마다.

물론 「동백꽃」에서는 마름집의 딸 점순이와 소작을 붙이는 우리집의 ‘나’라는 계급적 갈등이 있었고, 「봄∙봄」에서는 대릴 사위제로 인한 ‘나’와 장인간의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두 작품 다 주된 행위자는 ‘나’와 ‘점순이(동백꽃과 봄봄, 두 작품 다 여주인공 이름은 점순이다)’였고, 그들은 서로에게 연정을 품거나 품게 된다.

그럼 두 작품들 이외에는 어떤가? 산골마을의 소박한 젊은 남녀의 러브스토리가 김유정의 다른 단편들에도 나오는가? 아니다. 가족이란 이름 하에 남편과 부인간의 정(情)은 있을지 몰라도 남녀간의 연애에 치우친 작품들은 없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이 여럿 있지만 들병이와 러브스토리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 김유정의 생가

ⓒ2005 곽동운


♥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사랑

대부분의 김유정의 작품은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던 농민들의 이야기다.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금따는 콩밭, 노다지, 만무방, 산골, 가을..... 등등 김유정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런 이면에는 농민들과 주저 없이 막걸리 잔을 돌렸던 그의 호탕함과 약 한 첩 제대로 짓지 못하고 병마와 싸워야했던 그 자신의 궁핍함이 작용했으리라. 금병의숙이라는 야학을 지어 문맹퇴치에 일조를 했던 그의 따뜻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너무나 가난해 자신의 아내를 두고, 들병이로 나서라 재촉하는 당시의 처참했던 농촌상을 그리는 게 일련의 김유정 작품이 추구하는 바였다. 즉 「동백꽃」과 「봄∙봄」이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김유정 단편의 진면목은 「산골나그네」나 「만무방」,「금따는 콩밭」 등에서 나타난다. 그렇다. 「동백꽃」과 「봄∙봄」은 작가의 사회의식뿐만 아니라 작품의 연속성 측면에서도 김유정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다.



♥ 책장을 덮으며

김유정은 토속어 사용 등으로 유명한 작가다. 만약 그의 단편들을 원전으로 읽었다면, ‘독해’하느라 머리 좀 아팠을 것이다. 이 가람기획의 책에 본 기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2권 말미에 작품연보와 작가연보, 그리고 어휘풀이가 친절하게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작품은 마치 판소리 사설을 읽는 듯 리듬감도 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수록 읽는 속도가 붙는다.

일제의 수탈에 신음했던 1930년대의 농촌과 도시의 소외된 군상들을 특유의 해학과 재치로 덤덤히 풀어냈던 김유정의 작품들은 민족문학의 보배와도 같다. 병마로 30살도 채우지 못하고 불꽃같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였기에 누구보다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냈을 게다. 그래서 「동백꽃」과 「봄∙봄」에 김유정을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김유정이 너무 많지 않았나? 그렇지 않았나?



*** 들병이: 사전적 의미는 병술을 파는 떠돌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농한기에 술도 팔고 몸도 파는 여인네를 말한다. 자신의 부인을 들병이로 나서라고 다그칠 정도로 김유정 단편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그 당시 농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빚만 더 쌓여 갔으니. 카드빚에 내몰리고, 생활고에 내몰린 2005년의 서민들이나 대륙침탈에 눈이 먼 일제가 조선을 착취했던 1930년대의 농민들이나 7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고생하긴 매 일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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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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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공선옥 작가님!



녹음이 짙어지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평안하신지요? 지금 춘천은 참 아름답겠네요. 아아! 곧 전주로 이사를 간다고 하셨지요. 전주도 참 멋들어진 곳이지요. 비빔밥도 맛있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형식에 대해 한마디 합니다. 서평을 이렇게 편지글 형식으로 작성해 보는 게 처음입니다. 서평을 편지 형식으로 쓴다고 해서 누가 뭐랄 사람은 없겠죠? 객관성을 중시하며 각종 자료들이 동원되는 서평 글은 서평자의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아 균형감이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딱딱한 문체가 별로죠. 서평을 꼭 논문 쓰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전편에 흘러넘치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작가님의 시선은 너무나 따사로웠습니다. 그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카드 빛에 내몰리고, 재개발에 내몰리고, 가정파탄으로 내몰리고.... 우리네 고단한 서민들의 아픔에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당신의 착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작가님은 ‘아름다운 노래 따위 나는 부를 수 없다’고까지 하셨지요. 작가님은 “나도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 예술 한번 하고 싶었다. 예술. 그러나 나는 그렇게도 소원이던 예술을 이제와 포기하여 한다.”며 괴로워하셨지요. 또,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백죄 그러지 말아라.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입 좀 닥쳐라.” 라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그건 소외받은 이웃을 향해 따듯한 시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절대 외칠 수 없는 절규입니다.

<사는 게...> 중에서 제가 가장 숨죽이며 읽었던 부분은 “사랑은 가고 ‘러브’만 남은 이 휘황한 밤에”였습니다. 가난한 열여덟 살의 청년이 택시기사의 사납금 10만원을 뺐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또 이혼한 장애 여성이 단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랑하는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부분에서는 제 입술을 깨물어야 했습니다.

이 책 전반에 흐르는 키워드는 빈곤과 소외, 그에 따른 고단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 이외에 사람들은 이 책에 등장하지 않더군요. 뭐 작가님 자신과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는 몇몇 분이 계시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사는 게....>는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 속에서도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은 인생’들도 꿈틀거린다고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서평이라고 할 수 없겠죠. 아무리 편지 형식이라 해도 서평은 서평이니까요.
책에 대한 냉엄한 평가는 오간대 없고, 칭찬 일색이니. 일반독자에 의한 주례사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음 부분부터는 작가님을 위한 제 나름대로의 쓴소리를 적어보았습니다. 작가님과 제가 사회를 보는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는 게...> 를 보도 형식으로 조금만 다듬으면 신문의 사회면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신문 사회면 중에서 ‘경악스러울’만한 팩트를 추리고 거기에 ‘좋은 생각’을 접목해 놓은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고통스런 환경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대미를 장식하는 식이지요.

여기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 고단한 이웃들의 삶 자체가 사색의 대상이 되는 만큼 그에 따른 합당한 대안 제시도 필요합니다. ‘그게 지식인의 책무’라는 말은 너무 흔하죠?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혹자는 작가님에게 빈곤을 이용해먹는다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전 작가님이 그 비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 못지않게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끈을 던져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생생한 현장 기록들을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또 전 결코 대안 지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작가님에게 합당한 대안 제시를 요구하는 건, 대안이 빠진 <사는 게...>의 내용은 자칫 신문 사회면의 동어반복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그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충만함에도 작가님의 기록들과 사색이 2% 부족 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모습은 빈곤에 대한 지식인의 알량한 연민으로 내비칠 수 있습니다. 작가님이 그렇게 꺼리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오해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짧게 한 이야기만 더 할게요. 작가님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인정미가 넘치는 당신의 어린 시절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더군요. 그 시절은 항상 아름답게 떠올리셨어요. 그러나 그런 유년시절의 시골풍경들이 2005년에 휘돌고 있는 수많은 복잡한 일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복잡하고 골머리 썩이는 현실이 싫다고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시선들로 독자들의 시야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한 비판들이 작가님에게는 섭섭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서운해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저 한 독자의 애정 어린 비판으로 받아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소외되고, 외로운 이웃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건강조심하시고요.

건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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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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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래는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디스토피아?



♥♥♥ <강철군화>와 <가상역사 21세기>


<가상역사 21세기>를 손에 쥐었을 때 불현듯 잭 런던의 <강철군화>(잭 런던, 차미례 옮김, 한울출판사)가 내 머리를 스쳤다. 왜? 1908년에 출간된 <강철군화>는 20세기 초 노동자를 위해 투쟁한 혁명가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이야기인데, “그의 상류계급 출신의 아내 애비스 에버하트가 기록해 둔 원고가 사회민주주의의 전 세계적이고 최종적인 승리가 이루어진 이후로도 7백 년 동안이나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마침내 사회주의 세계국가 아디스의 한 문헌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공개된 형식을 취한 이색적인 구성의 걸작품이(<강철 군화> 3쪽)”기 때문이다.

<가상역사 21세기>가 100년 후 서기 2112년을 현재로 삼아 회고하는 방식이 독특해서 눈길이 간다? 에이, 겨우 100년 가지고 뭘 그러시나! 강철군화는 무려 700년 후인 27세기를 현 시점으로 삼고 있는데.

<가상역사 21세기>와 같은 먼 미래를 예측하는 책들은 현재(2005년)의 패러다임이나 시스템이 미래에는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 만약 소멸이 됐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런 일련의 작업들이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지은이의 미래 예측에서 섬세함을 기대한다는 건 애초에 단념하는 게 좋을 듯싶다. 대신 뭉뚱그려졌을지라도 현 패러다임과 시스템의 미래버전이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지켜본다면 나름대로의 소출이 있을 듯 싶다.

바로 1~2년의 미래가 아닌 약 100년여에 걸친 미래라면 더욱더 공백은 클 수밖에 없다. 그 공백을 메우는 건 오직 지은이들의 상상력의 질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가상역사의 공간을 채우는 지은이들의 픽션이 무엇을 근거하고 있는가가 미래서(書)의 주 관건이 된다.

미래서이기에 과학기술만 그 예측 근거로 쓰인다면, 반토막짜리 가상역사가 될 뿐이다. 의학, 환경, 인권평화, 시민사회...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과학만의 미래가 될 뿐이다. 그런 세상은 너무 위험하게만 느껴진다.

공동저자인 마이클 화이트와 젠트리 리가 각각 과학저술가와 미 우주항공국의 주임연구원인 터라 책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과학이 사회의 다른 영역을 앞도 하는 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되지 않나, 하는 우려가 있었다.

다행히 저자들의 직업관이 짙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관이 그리 폭넓지 못하다 게 필자의 결론이다. 서구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서술이나 기술이 또 다른 물신주의의 반열에 올려지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바로 그것이다.



♥♥♥ 유전자 지도

하지만 첫 번째 장인 생물학 혁명 부분은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21세기 벽두에 전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인간 유전자 지도의 완성은 유전학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게놈의 지도화로 동네 약국 어디에서나 개인 유전자 정보를 확인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 분석을 근거하면 각 개인의 향후 미래의 삶까지 예측되기에 고위 공직자들, 특히 정치인들은 인사 청문회나 재산공개뿐만 아니라 유전자 검증도 받아야 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랜디 홀랜드가 유전자 정보 스캔들에 휘말리는데, 그 정보는 단지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에서 나왔지만 그를 곤궁에 처하게 된다.

“전 세계의 신문과 웹사이트도 이 기사로 거의 도배하다시피 했다. 홀랜드는 즉각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러자 부통령 후보가 공화당의 새로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일주일 뒤 민주당은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전학은 새로운 학문이 지닌 거대한 힘을 과시하면서 정치의 판도를 바꿔놓았다(21쪽)”라며 게놈이 우리 일상사에 미칠 엄청난 영향력을 강조한다.

더구나 물리학이 접목된 형태인 분자의학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유전학은 인류의 생명연장을 뛰어넘어 직접 아기를 디자인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아기를 디자인 한다는 게 마치 생명을 ‘찍어’낸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특별히 종교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인간에 의한 ‘생명창조’가 과연 합당한 일인지 물음표를 달아 놓을 수밖에 없다.

또한 유전학과 미디어의 결합에 대한 부분도 빈약함이 느껴졌다. 지은이들은 대중의 자각이 있기 전에 핵시대가 도래했다며, 미디어를 통해서 유전학이 대중들의 견제를 받는다면 그것으로 좋은 일이라는 장밋빛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필자는 미디어와 동반자 길을 걷는 유전학이 긍정적인 요인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예측에 동의할 수 없다.

미디어에 의해 각색된 유전학은 대중의 환상에 부합되어 유전학이 몰고 올 파장을 희석시키지 않을까? 현재의(2005년) 서울대 황우석 박사에 대한 언론들의 시각이 칭찬 일변도인 터라 대중들의 유전학, 생명공학에 대한 접근 역시 그 범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유전학이 알기 쉬운 분야가 아닐뿐더러 (예방의학에 의한)생명연장과 같이 개인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기에 그 폐해를 통재한다는 건 대중들의 심리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도 있다.

핵무기처럼 대량살상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눈에 보이는 이득을 주는 유전학이 미디어의 힘까지 얻는다면 그것에 대한 폐해는 점점 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언젠가는 분명 폭발하겠지만.



♥♥♥ 핵전쟁

앞서도 언급했듯이, 먼 미래를 예측하는 책들은 현재의 패러다임이나 시스템이 미래에도 존재할 것인지,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예측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미래서 읽기에 초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상역사 21세기> 두 번째 장인 핵전쟁 편은 전형적인 fiction이었다. 2016년, 인도의 사이버 공격과 잠무∙카슈미르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모든 국가기능이 마비된 파키스탄이 핵탄두 미사일을 인도에 발사하고, 그 보복으로 인도도 파키스탄에 핵미사일을 발사해 일류는 말로만 듣던 핵전쟁을 맞이하게 된다는 게 줄거리다.

두 번째 장에서 핵 무장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잠무∙카슈미르를 두고 해묵은 분쟁을 일으킨다는 건 현재(2005년)의 구조다. 하지만 양국이 핵무기를 사용해, 말로만 듣던 핵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 구조에서 벗어나 최악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문제는 2005년의 구조와 2016년의 탈구조 사이에 인과관계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아니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전쟁이 하루 만에 종전된다는 건 핵전쟁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역설적으로 설명했다고 긍정적으로 해석 할 수 있다.

게릴라전에서 시작된 분쟁이 인도의 정규군 투입과 함께 사이버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어차피 픽션이기에 수세적 입장에 놓인 파키스탄의 핵사령관이 핵무기 버튼을 누른다는 가정은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재래식 전쟁에서 핵전쟁으로 넘어가는 장면 전환은 단 몇 시간 만에 이루어질 만큼 매우 설득력이 떨어졌다. 더군다나 아무리 도시 기능의 마비로 통신 시설이 차단됐다고 하더라도 뜬소문을 근거하여 핵 버튼을 누른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 오염에 대한 고려가 없었는지, 자국 국경과 가까운 곳을 향해 핵미사일이 발사되는 대목에서는 힘이 빠질 정도였다. 반목하는 상호간의 핵 보유를 두고, ‘공포의 균형’ 이라는 말을 쓸 만큼 핵무기의 사용은 마지막 카드, 최후에 카드로 사용돼야 함에도 <가상역사 21세기>에서는 ‘공포의 균형’이 와해되는 순간이 너무 순식간이었다.

오히려 강대국들의 핵잠수함 사령관의 오판으로 인하여 핵전쟁이 시작됐다고 하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상대국의 사이버전의 파장으로 지상과의 모든 교신 수단이 제한된 핵잠수함이 재래식 무기(어뢰)에 의해 피격된다. 잠수함 사령관은 이미 핵전쟁이 시작됐다고 판단, 적재된 탄도미사일(SLBM)을 모두 발사한다. 결국 온 인류는 핵전쟁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뭐 이런 식으로...


♥♥♥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위에 두 부분은 <가상역사 21세기>에서 필자가 가장 설득력 있게 느낀 것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예로 든 것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의미 있게 다가오는 부분은 꽤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3장 대혼란에서, 미래사회에서는 현재와 같은 고정급 임금제도가 낡은 방식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현재와 같은 급여지급 방식이 절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5장 네트와 6장 환경과 우주 부분도 눈여겨 볼만한 장이었다. 지은이 중의 한 사람인 젠트리 리가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연구원인 까닭에 우주에 대한 부분은 꽤 생동감이 있었다.

서론부분에서 <가상역사 21세기>를 감히(?) <강철군화>와 비교시켜 불쾌함을 느끼실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사회주의 작가라 칭송받는 잭 런던의 대표작 <강철군화>와 비교를 하다니! 둘 다 시점이 미래라는 것, 그런 만큼 픽션에 의해 쓰였다는 공통점이외에는 별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강철군화>는 위대한 소설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현재는 과거가 민만큼 미래가 당겨서 이루어졌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견인하는 두 축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관심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가상역사 21세기>는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계기를 던져주었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물론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꿈 꿀 것이다. 그러나 손놓고 있으면 자연스레 유토피아가 되는가? 미래가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사람의 의지에 의해 그것이 결정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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