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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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렝 드 보통. 너무나 익숙하지만 왠지 어려울 것 같아 선뜻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어떤 책일까 호기심이 일어나 한번 시도해보마 하고 읽어 내려갔는데 정말 내가 여태껏 읽었던 책 중 거의 최고이다. 이 책 한 권에는 내가 가장 최근에 읽었던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와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담겨있었다. 이 책 두 권 모두 우리나라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를 자랑했던 책들인데 알렝 드 보통의 책 한권에 집약되어있으니 너무 감격스러웠다. 게다가 글은 여러 가지 이해 할 수 있는 근거들을 조목조목 명료하게 써놓았는데 정말 한 문장 한 문장이 명언이었다.

알렝 드 보통은 프랑스인 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현실을 몇 세기 전에 벌써 겪었다. 그들은 지금 그나마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나(상대적으로 우리나라보다는)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아니, 어느 때보다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가 이미 겪었던, 그리고 지금에 와서 분석을 하는 서방국들을 참고하면 조금은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불안은 민주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오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나에게 이 견해는 굉장히 신선했다. 그런데 일리가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가 오면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해졌으며 부자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듣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을 나의 평범한 삶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믿음과는 달리 노력만으로 쉽사리 그들처럼 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괴감과 좌절에 빠지다가 결국 분노하기까지에 이른다. 이러한 좌절과 분노는 사회전체를 불안하게 한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한 결론은 무엇일까? 쓸데없는 기대와 희망을 버려라?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전반부에서 현실과 문제점을 제시한 후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 전에 읽었던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의 단점은 현재 사실들만 나열할 뿐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렝 드 보통은 나름의 해결책을 여러 가지 근거들을 통해 제시해준다. 특히, 철학적인 해결방법은 혜민스님의 조언들과도 비슷하다. 혜민스님 글과의 차이점을 굳이 꼽자면 이러한 지혜로운 처신법을 철학적 관점들을 예시로 끌어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해결책은 ‘예술’ 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은 한마디로 ‘쓸모없는 것’이다. 예술은 재화를 생산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렝 드 보통은 예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언급한다. 즉, 예술은 일상의 평범하고 사소한 것도 아름답고 가치 있게 보는 눈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술을 통해 사회를 고차원적으로 비평할 수도 있다. 예술은 인간을 상상하게 하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도록 해준다. 예술이 없다면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있을까? 이러한 새로운 시각과 상상력은 인간을 더욱 성장시킨다. 덤으로 예술을 통해 인간은 영혼을 정화시킨다. 생각해보면 인류는 단 한번도 예술과 손을 놓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구석기 시대인들도 동굴에 벽화를 그렸다. 그만큼 예술은 산소와 같은 존재이다. 예술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되면서 마음이 여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은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해결 방법이다!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뻥 뚫린것 같이 후련했다. 또한 예술의 장르 중 하나인 비극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겸손을 제공한다.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에서도 그랬듯이 언론은 인간에 대한 이해심이라고는 전혀 없다. 김두식씨는 그 예로 신정아 사건을 든다. 누군가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어찌 감히” 시선만 난무한다. 인간적으로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언론의 비난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만 지껄일 뿐이다. 사람들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언론의 장난에 휘말린다. 그런데 비극작품을 통해 사람들은 비극적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보고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을 느끼고 이해를 하게 된다. 이 또한 인간이 자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비극이 아니라도 이러한 감정 이입은 어떠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예술작품 감상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지 못했던 점은 현대사회에서의 돈=도덕이라는 개념이 팽배하다는 알렝 드 보통의 주장이었다. 아담 스미스가 처음 출현해 물질만능주의에 완전히 사로잡혀 자본주의를 맹신했던 시대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이 실제로 돈과 미덕이 정비례한다고 생각할까? 나만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걸까? 만약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나에겐 큰 충격일 것이다.

알렝 드 보통과 김두식씨는 참 통하는 점이 많았다. 그 둘 다 공통적으로 욕망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그 욕망을 채운다고 해서 불안해소와 평안에 이룰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물질=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을 듣고, 따스한 햇볕을 받고, 사랑을 하는 등 사소한 일상적인 행위에서도 충만한 행복과 감사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돈은 무한대이다. 따라서 돈의 노예가 된 순간부터는 끝이 없는 돈에 대한 갈구 때문에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김두식씨가 그랬듯 알렝 드 보통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예로 들며 타인들은 사실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니 남의 시선에 너무 영향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 또한 사람을 평가하거나 받고, 되거나 안된다고 결정하는 이런 사회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에 불평불만도 많이 했고 어쩌다 내려진 나에 대한 낮은 평가에 분노했다. 그런데 알렝 드 보통 말대로 사실 우리는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결정할 자격이 있을까? 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절대적일 수가 없는데 이런 기준으로 내가 울고 웃는 것이 바보 같았음을 깨달았다.

혜민스님의 글이 불교철학과 수행을 통한 인간존중에 대한 자각이라면 알렝 드 보통의 글에는 기독교적 철학에 따른 인간존중을 이야기한다. 기독교적 공동체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격차를 없애준다고 얘기하며 그러므로 공적 시스템이 질적으로 우수해지면 사람들이 일반 시민으로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글에 어떤 이들은 복지포퓰리즘과 이득창출의 효율성 저하를 예로 들며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90퍼센트가 이러한 공공재의 질적 효율성 증가를 위해 오히려 열심히 일하며 세금을 더 잘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 한 구석에 큰 욕심 없이 평범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자리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그렇게 평범하고 안락하려면 일단 경쟁에서 승리하고 봐야한다고 은근히 세뇌시킨다.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평범한 삶을 얻기 위해 남을 짓밟고 물어 죽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뒤에서 이를 지켜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는 것은 힘과 돈이 있는 계층들이다. 왜냐하면 소시민들이 죽기 살기로 노력한 대가는 고스란히 대부분 상위계층들이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밀어부친다. 더 더 더 열심히 해라! 더 더 더 경쟁해라!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인 것 같다.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사회보다는 다함께 잘사는 것이 더욱 얻는 게 많다는 인식 변화 말이다. 이것은 결국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의 마지막 작은 해결책과도 연결된다. 연대에 익숙해지자. 그러면 우리 삶도 조금은 ‘덜’ 불행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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