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류주의 자연사
롭 드살레.이안 태터샐 지음, 최영은 옮김 / 시그마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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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책의 제목과 저자 롭 드살레와 이안 태터셀의 경력과 직업만 봐도 증류주의 역사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증류주에 대해 최대한 과학적으로-한국적으로 말하면 이과적인-설명을 합니다.

심지어 증류나 미각뿐만 아니라 병을 보고 만지는 부분, 그리고 건배까지 과학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이 부분은 좀 지나치다고(인터넷 용어로는 뇌절이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책이 전체적으로 시적인 뜬구름 잡는 표현이 없고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라 좋았습니다.


1부 '역사와 사회 속 증류주-1. 우리가 증류주를 마시는 이유'에선 사실 다른 동물도 발효된 음식을 즐기지만, 이걸 액체로 뽑아내고 심지어 증류하는 건 인간뿐이라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진화생물학적으로 인간에게 음주가 왜 생존에 유리했는지 설명하고(물론 완벽한 이론은 아닙니다. 왜냐면 주위만 둘러봐도 에탄올에 취약한 유전자도 꽤 많이 자연선택됐거든요), 알코올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2. 증류의 역사 간단히 살펴보기'에선 증류의 어원을 설명하며, 원래 증류(distillation)라는 용어는 증류하면서 각각의 단계인 여과, 결정화, 추출, 승화 모두 통괄하는 용어였지만 연금술사들이 증류의 복잡성을 깨닫고 각 단계를 설명하는 어휘가 늘어나 정교해졌다고 합니다. 증류 기술이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해져 연금술사들이 발전시켰다는 역사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것 말고도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가 되기 이전부터 사용했던 걸로 추측되는 증류 기술, 실크로드로 전해 받은 중국의 백주 증류, 몽골의 증류 기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뒤의 둘도 아랍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대세입니다).


초창기 연금술사들은 증류기의 재질을 연구하면서 납도 사용했다는데, 결과물이 뿌옇게 변해서 사용하지 않았고(박가분을 생각하면 천만다행입니다) 구리는 이런 현상이 없고 황 성분도 제거해서 사용하게 되었답니다(요즘도 단식 증류기(Pot still)는 구리를 쓰죠?).


단식 증류기의 발명 뒤에 또 증류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연속식 증류기(Column Still, 생긴 게 기둥처럼 생겨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의 설명도 있습니다(아일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이 발명했으나 위스키 업계에서는 아일랜드는 주로 단식 증류기를 사용하고, 스코틀랜드는 블렌디드 위스키에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3. 증류주, 역사, 그리고 문화'에선 증류주는 초창기에 유럽에서 일종의 약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와인이나 맥주에 비해 수송이 쉬운 특성 때문에 빠르게 각 나라들의 주요 수출품목이 되었다네요. 잉여 곡물, 과일 저장용으로도 사용하고요.


증류주도 제국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특히 삼각무역의 상징인 럼, 이 럼을 밀어낸 버번위스키(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개발)가 말이죠.


증류주는 미국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는데, 보존이 좋은 증류주의 특성상 신대륙에선 거의 화폐로 사용되었다네요. 또한 위스키 반란, 남북전쟁,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과 골드러시, 금주법과 문샤인 등 미국의 굵직굵직한 역사에는 항상 버번위스키가 있었습니다. 버번에 관심이 있다면 이런 책의 설명이 흥미롭네요.


2부 '재료에서 효과까지-4. 재료'에선 본문을 펼치기에 앞서 우주에서 떠다니는 알코올로 저자는 과학적 농담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주까지 가서 알코올을 모으지 않고도 효모를 이용해 당을 에탄올로 만드는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부에선 '4. 재료~5. 증류'까지 물리화학적으로 알코올과 증류를 설명하는데, 결국 증류는 전체적으로 맥주와 와인 같은 저도주를 고도수로 높이는 과정이라는 걸 저자는 말합니다. 과학 없이는 역시 증류에 대해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6. 숙성, 할까? 말까?'에선 숙성도 과학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증류주가 안겨주는 즐거운 면모 중 하나가 바로 오크의 마법으로 일어난 다양성의 확장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맘에 들었습니다.


'8. 증류주와 당신의 감각'에선 뇌과학을 바탕으로 우리가 증류주를 병에서 따라 마시면서 느껴지는 것들을 설명합니다.

예전에 클루지 읽어서 이해가 잘 되네요. 이 책의 핵심 내용이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뇌는 주먹구구식으로 진화했다는 겁니다. 역시 독서는 서로 이어집니다.


3부에선 유명한 증류주들, 4부에선 덜 유명한 증류주들을 소개하는데, 증류주라는 공통된 술에서 방법은 다르지만 각자의 철학을 자신들의 증류주로 구현하려는 생산자들의 노력의 역사가 감동적이었습니다.


3부 '10. 보드카'에 선 소련 해체와 관련된 내용이 흥미로웠고, '11. 테킬라(와 메스칼)'에선 테킬라는 잘 몰랐는데 제조법과 역사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테킬라를 위한 아가베(용설란) 재배로 인한 환경오염으로 생물 다양성이 파괴되어 궁극적으론 테킬라도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무서웠습니다...

'12. 위스키'는 가장 메이저한 증류주라 그런지 3부에서 가장 자세하고 길었습니다.


4부의 '21.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에선 놀랍게도 한국의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 한국의 술자리 문화도 나왔습니다. 설명은 짧지만 외국인의 눈인데도 정확했습니다.


책의 맨 마지막에선 현재의 증류주 업계의 상황(코로나19, 소규모 증류소의 성장, 분자 위스키 등등)을 바탕으로 미래를 잠시 예측하면서 끝맺습니다.


사회생활하면서 바빠서 오랜만에 읽은 과학책인데, 증류주의 역사, 문화, 과학을 날줄과 씨줄을 엮듯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녹여낸 저자들의 정성이 느껴지고, 꼭 몇 번 더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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