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이한열 - 쓰러져 일으킨 그날의 이야기
김정희 지음 / 사회평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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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변혁의 파고가 들이칠 때면 거센 물살의 흐름만 보일 뿐 그 안의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된다. 모두 원하든, 원치 않든 파도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수많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로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처럼 ‘1987이한열’ 역시 역사가 바뀌는 순간을 경험했던 평범한 이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의 이야기, 사진 속 피흘리는 이한열을 부축하는 이종창의 이야기, 반대편에서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았던 한 전경의 이야기, 병원을 지켰던 학생, 그림을 그린 화가, 어릴 적 친구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1987년을 다시 말한다.


이처럼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도 보통의 삶을 살아갔던 많이 이들이 이한열의 죽음과 6월 민주항쟁으로 영원히 남게 된 이 시대의 결정적 장면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다. 소설가 김영하 역시 그렇게 같은 과 동기였던 이한열의 장례 운구 사진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는 이 책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누군가를 대신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어깨가 늘 그렇게 무겁다는 것. 이 세상에는 먼저 죽은 자들의 몫이 있다는 것. 한열을 떠올릴 때면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이한열이 감기에 걸린 채 바로 그날의 시위에 참가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감기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항쟁에 나섰다는 부분이 아니라, 몸이 아파서 약을 지었다는 그 평범한 사실에 마음이 울컥했다.


그의 가방에 있었던 감기약처럼 격렬한 항쟁의 순간조차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여전히 기억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가 민주주의에 헌신한 열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1987년 대학교 2학년의 평범한 청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최루탄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간 자리에 떨어져 있던 운동화 한 짝을 발견한 여학생이 있었다.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갈 때 운동화가 없으면 곤란해할까 봐’ 운동화를 챙겨 병원으로 여학생은 결국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평범한 청년으로서 이한열과 그 주변사람들은 그날 이후 결코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혁명이 끝나고, 모두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미처 되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해줄 운동화를 든 채 무거운 어깨로 살아간다. 이 책은 그 무거운 어깨를 덜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이자 기록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정희는 누구에게 대신 운동화를 전해 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손에 운동화를 든 채 하염없이 기다렸다. 운동화를 전달해 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저녁 시간은 깊어만 갔다.

"한열이는 시위 때 맨 앞에 서는 게 무섭다고 했고, 그런 솔직함 때문에 과격한 남학생들한테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하지만 성실했고 책임감이 강했죠. 그래서 소크로 나서는 걸 피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성실함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몸이 안 좋던 1987년 6월 9일에도 이한열은 소크로 나섰다.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에 살게 되었다면 우리를 대신해 죽은 사람들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기린다. 모두의 마음속에 그런 존재, 조용히 기억하고 기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전태일이겠고, 누군가에게는 그게 세월호의 승객들일 것이다. 나에게는 그게 한열이었다. 내가 그였을 수 있고, 그 또한 나였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김영하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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