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자리
리디아 유크나비치 지음, 임슬애 옮김 / 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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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은 너무 슬퍼서, 어떤 글은 너무 화나서, 어떤 글은 너무 행복해서 리뷰하기가 어렵다. 적절한 말을 고르기 어려운 까닭이다.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가장자리>는 셋 다 포함되는 책이다. 슬프고 화가 나는데 동시에 행복하기까지 하다. 


몇 달 전 애인은 나에게 '디깅(Digging)'이라는 말을 알려주었다. 디깅은 '파다'라는 영어단어 'dig'에서 파생한 것으로, 선호하는 품목이나 영역에 깊이 파고드는 행위를 뜻한다. 나는 자주 디깅하지만, 쉽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음악도, 책도, 음식도. 어쩌면 내 취향이 단호한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성공했다. <가장자리>가 내게 오기 전까지. 그동안 나는 메마르거나 굶주린 사람 같았다. 곧 죽을 사람 같았다. 살아있는 게 신기한 사람 같았다. 이제 와 보니 그렇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장자리>의 표지나 표4, 보도자료를 보아도 이 책이 당최 어떤 책인지 어떤 작가가 쓰는 어떤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불친절하다. 그래서 책을 접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책 진짜 좋고요. 나만 알고 싶은 책이라는 말을 쓰기엔 너무 알리고 싶어서 못 하겠고요. 꼭 읽어주세요. 좋으니까요. 그런데 좀 아파요. 짜증나요. 좆같다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돼요. 뱉게 돼요. 습관처럼.


추천은 이쯤 그만하고 아주 약간의 본문을 발췌해본다.


"다들 마음속으로는 해야 할 일을 해치우고 싶어 한다. 동네를 가꾸고 자기 집과 자기 자산을 개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이 너무 많은 데다가 아이까지 키우느라 좆같이 피곤하다. 어린 시절의 꿈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지쳐버렸다. 우리의 작고 처량한 꿈 풍선, 한때는 뜨거운 숨결로 부풀었으나 이제는 늙어 축 처진 살덩이처럼 천천히 쪼그라드네." p49


책이란 건 아무도 모르게 나를 조금씩 돌보고 자라게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내가 혼자서도 잘 크는 줄 안다. 책은 쌓여가고, 시간은 지나고, 쌓인 책 위에 또 다른 책이 쌓인다. 그 시간 겹겹이 내가 그어놓은 밑줄이 있고, 밑줄이 감당할 정도의 무게를 가진 문장이 있고, 미처 지탱하지 못해 찢겨 나가거나 필사된 말이 있다. 그런 말이, 삶이 있다. 지나고 보니 그렇다. 그리하여 내가 아직도 책을 사 모으고, 선물 받고, 선물 주고,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남의 책을 읽고, 팔고, 그러다 이런 행동으로는 성이 안 차 내 책을 펴내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돈 드는 것 대신 내게 위안을 주는 물건들로 집을 채웠다. 돌과 깃털과 동물의 작은 뼛조각이 담긴 접시와 그릇. 푸른 구슬을 채운 컵. 조개껍데기와 부적과 자질구레한 장식품. 그리고 책.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책. 방마다, 선반과 테이블과 바닥에 높게 쌓아놓은 책. 책은 과거의 나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p50


이 책은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다. 챕터가 끝나고 계속, 어딘가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혹은 나를, 나와 애인을, 나와 애인이 꾸리고 있는 이 세계를 수색하고 수사하는 형사가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증거를 찾으려는 듯이. 그래서 우릴 감옥에 처넣으려는 듯이. 


"나는 피 대신 달콤한 백설탕이 쏟아지는 것처럼 그의 손목에 남은 울퉁불퉁한 상처에 입 맞출 수 있으니까. (..)우리는 버려지고 폐허가 된 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중이다. 한동안 우리 둘 다 심리 치료나 보험같이 안녕한 삶을 위한 서비스에 돈을 쓸 수 없었다." P54


한때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삶이 있다고 작가는 믿었다. 죽음의 이면이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낡은 보도블럭이 몇 개인지 세면서 걷고, 어느 가발 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병든 고양이를 보고, 곧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을 어둠이 끌어안은 것을 보면서 모든 게 죽음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 생각한다. 이게 나의 근황이며, 리뷰라고 보기에는 사설이 너무 많이 섞여버린 내 일기의 한 페이지.


애인이 집으로 떠나고 나는 열심히 방을 치웠다. 애인 없이도 나는 방을 치울 수 있는 사람이다.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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