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꽃을 삼킨 아이 담쟁이 문고
박향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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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로는 안이한 말이긴 하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에 분연히, 사사건건, 당차게 반기를 드는 ‘얼음꽃을 삼킨 아이’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다. 작가 박향 씨는 무려 10년간 이 소설을 쓰고 다듬었다고 한다. 비슷한 연배라 그런지 작가가 복원해낸 1970년대 부산의 풍경은 게으름과 외로움과 아픈 기억으로 과거를 되도록 묻지 않았던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10월 유신 유비무환'의 글귀, 등화관제의 검은 어둠, 쓰레기 같은 선생과 방과후 불을 꺼둔 교실에서 내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준 선생과 독한 사랑의 아픔을 가르쳐 준 선생, 부당함과 억울함과 분노와 잔인함을 끄집어내어 찢어발기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노릇을 번갈아했던 친구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와 근거 없는 두려움의 기억……. 육영수 여사의 죽음이 있었던 1975년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1981년까지 초·중·고를 다녔던 한 소녀가 겪은 시대사와 가족사를 읽으면서, (중년여성인) 우리가 어떤 상처위에서 커왔고, 어떤 기억을 삼킨 채 나이 들어가게 될 것이지를 더듬어보기를. 이 독서가 용케 잊었던 비밀스러운 당신만의 통증을 되살려낼지라도.

 

-첫 장 <심부름> 편에서-


아버지는 재작년부터 나를 몇 번 낚싯집에 데려가더니 5학년이 되자 미끼 사오는 일을 아예 나에게 맡겨버렸다.

(중략) 
 

우리 집은 천마산 아래 남부민동에 위치해 있다. 검정색 루핑지붕과 슬레이트지붕, 나무판자로 이어 붙인 집들이 천마산 중턱에 무채색으로 모자이크한 도화지 그림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 집들 중에서 그래도 우리 집은 산복도로와 맞붙은 아래쪽이다. 비록 페인트는 벗겨져 낡아 보이지만, 몇 년 전 태풍에 슬레이트지붕이 날아가는 바람에 아예 옥상이 있는 단층 양옥집으로 새로 지었다.
윗동네와 아랫동네는 빈부의 차가 보일 정도로 차이가 난다. 산 쪽으로 올라갈수록 루핑지붕의 타르는 쩍쩍 갈라져 있고, 처마도 더 내려앉아 있다. 썩은 판자 틈으로 가난이 오래된 이끼처럼 덕지덕지 묻어 아예 식구들을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곳도 많다. 윗동네는 피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윗동네 아랫동네가 없었다.

(중략)

아이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부산 최대의 공창가인 완월동까지 간 적도 많았다. 유리창마다 정육점처럼 벌건 불이 새어 나오는 그곳을 지날 때면 누구랄 것도 없이 발걸음이 빨라졌다.
 

(중략)

낚시 미끼를 파는 집은 완월동 다음 정류장인 충무동에 있었다. 언제나 화가 난 듯 불어터진 얼굴을 한 낚싯집 주인아저씨는 미끼를 신문지 봉투에 넣어주었다. 신문지를 적당한 트기로 오려서 만든 종이봉투였다. 그 얇디얇은 종이봉투 안에 낚시 미끼인 갯지렁이가 들어 있었다. 몸에 털이 북슬북슬하게 나 있는 그것들은 축축하고 음탕했다. 서로의 몸을 칭칭 감으며 너나없이 뒤섞여 있는 무리를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구역질이 우웩 하고 치밀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징그러운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신문지가 터지는 위험천만한 일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렁이 몸에서 발산되는 습기로 인해 손바닥이 맞닿은 신문지는 축축해졌다. 혹여 찢어질까 봐 나는 지렁이가 하는 말이라도 들으려는 사람처럼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다. 평소 신문 읽는 일은 없지만 지렁이를 담아갈 때만은 오로지 신문지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른 인물사진도 만나지만 신문지 봉투에서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였다. 어쩌면 신문에 나오는 사람 중에 대통령만이 내가 정확하게 얼굴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젖어들까? 봉투가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종종 대통령 각하의 이마나 턱, 양볼 중 어느 쪽이 먼저 지렁이의 습기로 젖어드는지 혼자 내기를 걸곤 했다. 그러다가 입술이나 콧구멍 어느 한쪽이 젖어들기 시작하면 마치 불경죄라도 저지른 양 흠칫 몸을 떨고는 누가 보진 않았나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대통령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내 손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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