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흔적 2호 다언어 문화이론 및 번역 총서 흔적 2
문화과학사 편집부 엮음 / 문화과학사 / 200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년 전에 야심차게 나왔던 잡지 [흔적] 2호. 얀 물리에르 부탕의 글을 읽어보려고 고향 집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을 끄집어냈다. 꺼내보니 레이 초우나 사키야마 마사키, 모리 요시타카, 오카 마리, 고마고메 다케시 같은 이들의 글도 실려 있어서 좀 훑어보다, 2001년에는 이런 이름들을 알지도 못했을 테고 이런 논의들을 지금만큼도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어쩌다 이런 책들을 사보았을까 싶었다. 하기야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후만 해도 지금보다는 좀 더 날카로운(?) 혹은 예민한 연구자 지망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부탕의 글은 짧고 거친 감도 있지만 흥미로웠다. 사진을 찍은 이런 부분은 좀 기억해 두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어쨌든 산업 예비군 논리로 인종주의를 모른 체할 수는 없다는 것. 이동들과 그것을 가로막는 새로운 장벽으로서의 인종주의와 이를 비껴 가려 하는 사선들...
(그건 그렇고 단명해 버린 이 잡지와 같은 시도가 요즘에도 있으면 재미있을 텐데. 이 세대 후에 더 이상 이런 식의 흥미로운 조류는 없는 것 같다. 이 당시에는 이름도 모르던 유학 시절 지도교수 T 선생님과 그 친구들의 세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キャプテンサンダ-ボルト (單行本)
아베 가즈시게 / 文藝春秋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베 가즈시게와 이사카 고타로의 합작 소설. 인터뷰 등에서 창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각자의 색깔이 은연 중에 드러나면서도 잘 조화된 한 권의 소설이 된 것은 그러한 과정 덕분이기도 한 것 같다.
마치 헐리우드 영화처럼 재미있다. 물론 그런 만큼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고, 버디 캐릭터들은 매력적이지만 시종일관 다소 우연적인 전개에 기대고 있기도 하다. 작가들이 이미 밝힌 자 있듯 음모론적인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지만, 배경이 되는 설정 자체도 그렇게 관심이 가지는 않는다. 그렇다 해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그럭저럭 즐겨보는 나로서는 가끔은 손에 땀을 쥐기도 하며(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즐겁게 보았다.
아베 가즈시게를 읽었을 때 특유의 껄끄러운 뒷맛이 없는 것은 이사카 고타로의 소위 소시민적 영웅주의 덕분인 건가, 싶기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신간 평가단으로서 쓸 마지막 리뷰 두 개가 너무나 늦어지는 바람에 소위 유종의 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지고 말았다. 한가한 반백수 생활을 보내리라던 당초의 예상과 달리, 소소한 일거리가 운 좋게도 적잖이 생기는 바람에, 그리고 방학 때 해야 할 일을 지나치게 게을리 한 탓도 있어서 점점 더 바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내게 소모적인 글쓰기를 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공짜 책이 뭐라고 그 고생을 사서 하냐며 고개를 흔들었던 친구도 있었지만, 바쁘기 때문에 취미로서의 독서를 거의 하지 못한 요 두어 달을 떠올려 보면 나는 이번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의무라는 핑계를 대고 소설들을 읽고, 괴로워 하면서도 읽은 것들에 대해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는 일은 오히려 어떤 방어선이 아니었나 하고.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을 꼽아보자면, 리뷰에도 썼던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해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아니었나 소설이 던졌던 물음들은 아직 고스란히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필립 로스의 책을 읽게 된 것이 좋았다. 비록 그 뒤로 몇 권을 더 찾아 읽다, 약간 동어반복적이라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내맘대로 베스트 5라고 하지만 순서를 정하기는 너무 어려울 것 같으니 일단 다섯 권을 꼽기만 하는 걸로. [미국의 목가]와 [소년이 온다]는 물론 들어갈 테고, [모파상 단편선]과 [제르미날]은 역시 고전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하나를 더 고르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선정된 책들은 대체로 내가 골랐던 것들과 달랐고, 그랬기 때문에 바쁜 탓도 있고 해서 어쩐지 사전 페이퍼를 작성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된 느낌도 있는데, 거의 매달 한국소설이 한 권씩 들어있다는 우연적인 조화에는 거의 매달 놀랐다. 덕분에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 책들을 읽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고, 일일이 다른 사람들의 표를 집계해 본 적은 없지만 신간 평가단 여러분들의 취향에 대해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누군가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이따금 끄적일 뿐이지만 마음이 내키면 블로그에도 놀러오세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올해 평온한 시간 보내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르미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르미날 1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르미날]을 읽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다. 학부 시절 역사학과 수업에서 과제로 서평을 썼는데, 과연 뭐라고 썼던가가 궁금해져서 (다시 쓸만한 부분이 없나 찾아보려는 의도도 전혀 없지 않았지만) 이미 몇 번씩 교체되어 백업조차 남아있지 않은 하드디스크를 뒤지는 대신 레포트 파일들을 메일로 보내 두곤 했던 다음 계정을 뒤적여 보았지만, 지난 메일을 하나하나 열어보는 것도 귀찮아져서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대신 영화를 봤던 기억은 아직 어렴풋이 남아있어서, 에티엔이나 카트린, 마외라는 그리운 이름들을 마찬가지로 그리운 영화배우들의 얼굴로 상상하면서 책을 읽어 나갔다.


  글쎄, [제르미날]이라는 책에 대해 이런 형식의 소소한 글에서 더 이상 덧붙일 만한 말이 있을지 모르겠다. 여전히 에티엔은 가망 없는 계몽주의자이고, 소위 지식인들 혹은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가 짙어진다. 아무리 '자연주의'라고 하지만, 카트린은 너무나 수동적으로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마외의 가족들은 또 너무나 비참한데, 그럼에도 나는 왜 그렇게 식구가 많아야 하는지, 왜 그렇게 이른 시기부터 아이들만 자꾸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광부들의 환경이 그러하니까"라는 대답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마치 소설 속의 부르주아들 같은 다소 차가운 시선을 무심코 던지고 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작년 여름에 열심히 읽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밤]을 몇 번씩 떠올렸다. 책에 대한 그들의 꿈에 정말이지 감동했던 나지만, 책의 인간이 된 에티엔이 파리로 떠나면서 듣는 지하의 리블렌 소리는 아무래도 곧 싹을 틔울 희망의 징조 같지는 않다. 


  어쨌든 [제르미날]은 한때 내가 고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어떤 형태를 보여준다. 서사는 주로 개인에 초점을 맞춰서 쓰이기에 집단이 등장할 때에는 그들이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흘러가는 모습들을 보여줄 뿐이지만, [제르미날] 그리고 루공 마카르 총서 자체는 집단이 사실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그들은 한 덩어리로 보일 때조차 들여다 보면 하나하나의 얼굴들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제한된 배경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니 굶주리는 광부들을 위해 분노하고 슬퍼하면서도, 엔보 씨의 너무나 부르주아적인 고민을 단지 비웃거나 비난하기도 어렵고, 네그렐은 스탕달 소설에 등장할 법한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의 제재들은 그 자체로 사회적 위계의 반영이었다고 한다면, 소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지면 위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소설은 어떤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던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대에도 이제 그들 혹은 우리는 소설을 그리고 문자를 소유한다. 어쩌면 이것이 가능성일까?


  하지만 애초에 자연과학자처럼 세계를, 그리고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근거 없는 희망 혹은 변혁의 가능성을 거기서 읽어내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소설의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졸라의 객관적인 시각들, 그래서 손쉬운 감정이입을 허락하지 않는 서술들은 소설의 힘이기도 하고, 이 세계에 대한 소위 객관적이고 리얼한 관점에서 비롯된 절망과도 이어진다. 그렇다고 소설이 언어로써 수행하고 있는 바로 그 자체가, 기약 없는 새 세계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더욱 혁명적이라고, 그래서 책 쓰기 혹은 책 읽기가 바로 무언가를 실제로 행하고 바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안이한 감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지금의 맥락에 다시 놓을 때, 같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가능하기도 한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이 많은 소설들이 주지는 않는, 역사성이라는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 한국문학을 연구하시는 D 선생님과 만났을 때, 선생님이 최서해 이야기를 했다. 바로, 혁명을 통해 세계를 바꾸기 위해 만주로 달려갔지만, 배고픔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혁명도 없더라는, 소설과 작가 자신의 이야기. 우리는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들을 직선적으로, 앞으로 걸어온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문제들은 똑같거나 다른 방식으로 남아있다. 세계는 그렇다고, [제르미날]은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람들은 얼마나 자라났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은 지는 벌써 한 달쯤 된 것 같은데, 일에 쫓기다 이제야 리뷰를 쓴다. 사실 나만 해도 그렇게 단가가 높다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비정기적으로 하면서 사는 노동자인 것이다. 말을 다루기에 '육체' 노동자라고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실 언어를 말하고 듣고 쓰는 것도 신체와 무관한 일은 아니지 않던가? 그래서 아직 중대한 마감 하나를 털어내지 못한 내게는 이미 고질적인 알레르기가 시작되려는 전초가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이렇게 무엇을 어떻게 쓸 지에 대해 조금 고민하는 지금도 두피와 얼굴이 어쩐지 가렵다. 날씨도 건조해졌겠다, 개인적으로는 일 년여 만에 항히스타민제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서 기억에 남는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현대인으로,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최전선을 달리는 한국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아직 소년이든, 어른이든, 더 윗세대의 어른이든 불면증에 시달리고, 그 괴로움 때문에 목숨을 끊고 싶어질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다들 외롭고 힘겹다. 하지만 해결책은 없다. 자기가 죽든가, 남을 죽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불면의 밤들, 끝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그저 견디고 견뎌야 할 뿐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그러한 힘겨움을 아주 조금 서로 보듬을 수 있다. 사람들은 관계를 통해 연대한다기보다 그저 삶으로부터 떨어지기 직전에 겨우 서로를 붙들 수 있을 뿐인데, 그 기회조차 만나기가 쉽지는 않다. 사람들은 쉽게 떠난다.


  사람들은 쉽게 떠난다라고 썼지만, 어떤 단편들에서 그것은 아내들은 쉽게 떠난다로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섬 처녀들을 가지고 놀다 훌쩍 배를 타고 뭍으로 떠나버리는 그럭저럭 부잣집 도련님도 있지만, 다른 단편들에서 주로 남자인 주인공들은 아내가 떠남으로 인해서 한층 더 아래의 불행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거기서는 정말이지 삶의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비참하고 초라하며 역시나 외롭고 힘겨운 삶들이 꾸역꾸역 이어진다. 그래서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사실 소설들을 대부분 마치 어떤 특정한 사람을 필드로 쓴 인류학적 조사의 단편들처럼 겉에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런 삶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세계들이 있다. 그런데.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잘 수 없다면 대체 얼마나 괴로울까를 상상해 보며 몸서리를 치는 것 이상으로 이야기들이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비슷비슷하게 불행한 뉴스들을 이미 너무나 많이 봐 왔고, 그것들을 가령 소설로 '리얼하게' 쓴 것을 보았을 때 어떠한 감각으로 어떠한 사고들을 해야 하는지를 이제 알 수 없게 돼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 하느님! 제발이지 아이에게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동안 그는 마음속으로 절박하게 외쳐댔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이렇게 나약하고 이렇게 무능한데 신을 믿지 않는다니! 그는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불행한 삶인지 새삼 깨달았다.


  여기서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씩 줄을 그었다. 우리의 세계에 신이 필요하다고 새삼 말할 수는 없지만, 내세가 됐든 천당과 지옥이 됐든 신의 심판이 됐든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삶을 지속해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욱이 매일매일의 세속적인 즐거움조차 손에 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생존일 뿐인 삶을 유지한다는 것조차 힘들다면? 지켜야 할 누군가도 없고, 지켜줄 힘도 없다면? 아아, 이렇게 나약하고 이렇게 무능한데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니! 하고, 삶의 위태로움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 말들이, 혹은 소설들이 우리에게 어떤 힘이라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것은 값싼 위로나 격려여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비극적인 소설들보다 더 불행한 것 같은 일들을 뉴스로 계속해서 보고 접하는 지금 나는 힐링이 아닌 다른 구원의 힘을, 말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어떤 다른 가능성들을 아무래도 찾고 만다. 이 다음, 이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