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탐정은 죽지 않는다 - The Gifted ㅣ Nobless Club 19
이슬기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탐정은 죽지 않는다>는 1인칭주인공시점의 글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종종 그 사실을 잊고 마치 2인칭이나 3인칭시점의 글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중간에 시점이 마구 바뀐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이 책의 문장들은 절제되었으며 주인공은 "나"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속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직업이 탐정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얀 트로닉은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나는 얀의 눈과 귀를 통해 빌런트라는 도시, 그리고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들은 대게 절제된 문장을 통해 묘사되곤 한다. 절제라는 표현을 썼지만 바꿔말해 서술자에 의해 선택된 것이기도 하다. 간결한 분량에 필요한 것을 담으려면 더욱 세심하게 재료를 골라야 한다.
"이틀간 계속된 비로 기어 나온 지렁이를 밟은 모건이 투덜거렸다." - 본문 81쪽에서.
이 하나의 문장만 해도 여러가지 것들이 담겨 있다.
지렁이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존재다. 이 장면의 두 남자는 기어다니는 지렁이를 미리 발견할 만큼 조심스럽지도 않고 그 미물을 구해줄 만큼 친절하지도 않지만 지렁이를 밟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는 된다. 관찰이라는 것은 대상에 그만한 관심을 기울일 때 가능한 일이다. 밟기 전의 지렁이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순간 날씨, 도시의 환경, 나아가 인물의 성격까지 그려내는 매개가 된다.
"투덜거렸다"라는 다소 부정적인 서술어로 끝나면서 그나마 그 감정의 주체도 얀이 아니라 모건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은 냉정한 척 하면서 다른 대상에 감정을 슬그머니 감춰두곤 한다.
추리소설에서 작가는 적당한 위치에 단서들을 던져 놓으며 독자들을 유도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털어놓으면 독자가 쉽게 답을 찾아서 맥이 빠지고, 그렇다고 너무 많은 것을 감춰놓으면 독자가 길을 잃고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 한다.
문장들이 건조하고 절제된 듯 보이지만 실상은 화자가 보여주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춰 철저하게 선택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얀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문장 아래 감춘 채 독자들에게는 잘 다음어진 표면만 보여주려 한다. 여기에 이미 그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것은 얀 트로닉이 만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감추기 위해 처절하리만치 애를 쓴다. 그리고 얀은 탐정 특유의 추리력과 관찰력으로 그들이 숨겨둔 것을 찾아낸다.
얀이 상대의 거짓 표정과 꾸민 몸짓에 감춰진 속마음을 읽어낸다면 나는 절제된 문장들에 가려진 그의 마음을 읽어내야 했다. 그에게 속지 않기 위해. 도시의 밤길에서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노련한 탐정답게 자신을 가장하지만 사건의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고 사람들의 비밀이 폭로되면서 얀의 과거와 고통, 그의 감정도 조금씩 수면위로 떠오른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많은 것들을 감추고 있다.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한 척 한다.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자 얀의 매력이겠지만.
탐정소설에서는 퍼즐 맞추듯 이어지는 단서들과 그것들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만약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놓여있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이 나열된다면 쉽게 헛점을 드러낼 수 있다. 여기에 과학이 아닌 것, 현실의 과학과 논리를 무시하는 판타지를 끼워넣는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어지간히 잘 짜여진 설정이 아니면 독자에게 위화감만 주거나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 이 책은 그점에서 "밸런스"가 잘 잡힌 편이다. 특유의 문체와 도시의 분위기도 거기에 한몫을 하고 있고.
탐정소설로서도 손색없는 잘 짜여진 구성과 적절하게 가미된 판타지 요소들, 매력적인 캐릭터와 거침없는 액션 등이 균형을 이루며 다양한 재미를 준다. 재능, 권력, 혹은 인생에 대해 나름의 화두도 간간히 보인다. 그러면서 부담은 없다. 그저 입맛대로 원하는 메뉴를 골라 즐기면 되리라.
길게 적었지만, 결론적으로 상당히 재미있고 만족스럽게 읽었다. 신인작가라고 들었는데, 작가에게도 또 그런 작가를 발굴한 편집부에도 충분히 기대감을 갖게 하는 책이었다. 얀 트로닉 시리즈도 좋고 전혀 다른 이야기라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