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하지만 나는 이 서글프고 굶주리고 황폐하고 절뚝거리고 사지가 절단된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기회가 닿는다면, 미래에든 천국에서든 감옥에서든 지하에서든 다른 어떤 곳에서라도 당신을 만나거나, 당신이 탈출했을 때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까. 무슨 이야기라도 털어놓다 보면, 적어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기 있어서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실로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당신한테 털어놓음으로써, 당신이 존재할 것을 의지로 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마거릿 애트우드, 김선형 역, <시녀 이야기> 458쪽)


때로 우리의 말들은 사치스럽다. 말은 어느새 말로서의 기능과 의도를 잊고 공중만 멤돌다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내뱉은 말들이 타인에게 가 닿으리라는 믿음이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입을 열고 말들을 엮어낸다. 기록도 마찬가지다. 나와 타인들, 타인들의 타인들, 우리의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또 기억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본래 말이란 타인과의 소통이자, 세계에 대한 믿음이자, 나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말을 하고 너와 연결됨으로써 나는 비로소 이 세상에 하나의존재가 되고, 한 명의 인간이 되고, 세계에 속한 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듣는 이 없는 말이란 실은, 나 스스로가 이곳에 발 딛지 못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증명은 반드시 한 가지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듣는 이를 통하여 내가 세상에 존재함을 '증명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듣는 이가 존재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스스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낼'수도 있다. 요컨대 이는 자기실현적인 선언이다.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들을 '당신'은 분명 있을 것이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빛 한 줄기 없이 존재를 부정당하는 이가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증명하고 지켜나가는 방식이다.


여성주의적 구술사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말함으로써 기록이 되고, 그것이 역사가 되는 방식에 대하여 고민해 본다. 역사란 자고로 당대의 모든 시대상을 오롯이 객관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믿는 우리에게, 한두명의 입을 통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야사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일상의 가장 사소하고 하찮은 기억들, 예컨대 그 일이 일어난 날 아침의 유달리 차고 맑았던 공기나 구름의 모양, 대기의 술렁임, 잠깐 찌푸린 하늘 아래서 재채기를 몇 번이나 연달아 했던 기억들, 같은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물론 사소한 기억들 내에서도 위계는 있다. 예컨대 출정 전날 저녁 전투화를 윤이 나게 닦았던 병사의 기억은 그를 위해 밥을 짓던 여성이 부엌불을 들여다보던 기억보다 훨씬 중요하다. 시위에 나가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던 남성의 기억 역시 그를 위해 도시락을 만들고 치마폭에 숨겨 나르던 여성의 기억보다 훨씬 가치를 가진 것으로 얘기된다. 말을 통하여 남는 기록은 '가치가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기록일수록 더더욱 사소하고 '하찮다'.

더욱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록들에 밀려 사라지는 이들의 기록,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기록, 그러니까 우리들의 기록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저 가만히 앉아 기록함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역사는 때로 가장 적극적인 재판관이 되어 우리의 목소리를 덮고, 찢어발기고, 해체하고, 또 왜곡시킨다. '우리의 목소리를 기억해주세요'라는 외침은 어디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잊히지 않고 바래지 않은 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때 어떤 외침이 들려온다. 우울하고 축축하고 가녀린 고민들을 뚫고 들려오는 고함소리. "나는 당신이 존재할 것을 명령하는 바이다."

스스로 소리치는 역사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이야기를 잊지 말고 기억해줄 것을 부탁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기억할 것을 명령하고 그럼으로써 나를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세울 수 있는 목소리란 어떤 것일까? 이것은 과연 가능한가? 듣는 자와 말하는 자의 위계를 뒤집고, 기록하는 자와 그것을 평가하는 자의 권력을 전복하여 펜끝을 역사가의 가슴에 바싹 들이미는 일은 가능할까?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해낼 수 있을까? <시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어쩌면 이를 시도한 최초의 모험가 중 한 명인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가장자리를 잘 밟아 다지는 것처럼, 그는 끝없이 예전의 기억들을 회상하고 그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려 노력한다. 끝없이 뇌를 멈추지 않고 주변의 사물들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실제보다도 더욱 생생히 간직하려 애쓴다. 자신의 목소리를 끝없이 의심하고 자신이 실은 미쳐버린 게 아닌가, 이 모든 게 꿈인 것은 아닌가, 아니 실은 원래의 삶이었다고 믿고 있던 것이 그저 자신의 망상은 아닌가 염려하면서도 강박적으로 모든 것을 적어내려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페이지 너머를 똑바로 겨냥한다. 펜도 없이 갈라진 손톱을 들이밀며, 누구보다도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을 존재케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는 과연 후대의 이들에게 제대로 가 닿았던 것일까? 어쩌면그의 목소리는 애초의 의미를 잃고 결국 하나의 사료 혹은 흥미로운 이야기(tale)로 소비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실은 그의 이야기를 '시녀 이야기'로 부르는 것 자체가 모욕인지도 모른다. 만약 최초의 발견자에게 그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잘 가 닿았다면, 아마 그는 감히 그런 이름을 짓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표현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의 시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대인의 시각으로 그들의 제도와 경험을 이해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의 시각을 통해 봤을 때 이들이 그저 이상하고 어리석은 이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한때 신념처럼 떠받들었던, 아니 실은 너무 당연해서 신념이고 뭐고 뭐 당연한 소리지 하고 넘어갔던 말을 돌아보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가시에 처음으로 심장을 찔렸음을 깨닫는다. 마음을 베이고 여러 번 찔려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아프고 괴로워졌음을 깨닫는다. '당대인의 시각'. 나는 그동안 과연 사료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뭘로 읽어 왔던 것일까. 당대인의 시각이란 대체 누구의 시각을 얘기하는 걸까. 그 당대인의 시각 속에서조차 나의 주인공들은 버려지고 배신당해 나뒹굴었을 것이 분명한데. 객관적 시각이니 지식이니 하는 것들에 이미 오래 전 믿음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았고 나는 여전히 야비하고 비겁한 지식생산자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사학을 공부하며 얻었던 지식과 신념들은 다시 한 번 부서진다. 나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있다.


내가 봤을 때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기억과 목소리, 전달,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어떻게 잊혀지지 않고 전달되고 기록되어 역사가 되는지,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역사가에 의하여 채택되어 역사가 되는 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면서 직접 잉크가 되는 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시나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되었고, 아직 구체적인 말로 풀어낼 자신은 없으나 생각의 전환을 하게끔 해 준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너무 가슴이 아파서 힘들고 괴로웠고, 얼굴 뻔뻔한 역사가들의 목소리에 나 자신의 모습이 이입되어 더욱 힘겨웠다. 힘겨움이 내게 어떤 결실을 가져다줄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하하 2019-09-24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감상평을 읽은 것 같아요
 
낙태에 대한 옹호 서양 철학의 논문들 6
주디스 자비스 톰슨 지음, 김혜연.신우승 옮김 / 전기가오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낙태, 그러니까 인공 임신중절에 대한 논쟁은 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상당히 파편적이고 '도덕'과 관계된 예민한 사안으로 취급받고 있다. 초등학교 때였나 학급에서 토론수업을 했던 게 기억나는데, 주제는 당시 가장 핫했던 '줄기세포 연구로 인한 여성 난자의 의학적 활용을 도덕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와, '낙태는 허용되어야 하는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자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후자는 아직까지도 여러 학급이나 학원 등에서 심심찮게 소환되는 주제인 것으로 아는데, 거기 나오는 대답이라봐야 뭐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혹은 자유 중에 뭐가 더 중요하나 그런 것들이겠지. 

 

주디스 자비스 톰슨의 "낙태에 대한 옹호"는 1971년 출간된 논문으로, 임신중절을 둘러싼 수많은 윤리적, 철학적, 여성주의적 논쟁의 초반부에 위치해 있다. 이것이 이제야 한국어로 번역된 것인데, 해당 논문을 출간/번역한 전기가오리 출판사는 책의 뒤에 역자인 이혜정 선생의 논문을 함께 실어 놓았다. 이혜정에 따르면 임신중절을 둘러싼 입장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물론 태아는 소중하니 임산부가 죽든 말든 무조건 낙태는 안된다는 보수주의 입장은 제외하고) 이는 다음과 같다.

 

1) 자율성 옹호 이론: 여성주의 도덕 이론에 입각해서 임신중절을 바라보며, 자율성을 옹호하는 철학자들. (톰슨, 잉글리쉬, 오버럴)

2) 평등 이론: 자율성 옹호를 비판하면서 여성주의 도덕 이론을 적용하는 이들. (스미스, 재거, 맥키넌, 마르코비츠)

3) 보살핌 관계 이론: 여성적 윤리 이론에 의거하여 임신중절을 바라보는 여성주의 윤리학자들. (길리건, 나딩스)


이 정리에 따르면 책의 저자인 톰슨은 첫 번째 입장에 속하는 이로, 여성주의 도덕 이론에 입각하되 임신중절을 어디까지나 '자율성'의 측면에서 정당화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여성의 생식권'과 여성 자신의 '신체적 온전성의 권리 rights to bodily integrity'이다. 톰슨은 글 안에서 여러가지 기발한 비유들을 들어 가며 여성의 임신중절을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낙인찍고 금지하는 일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를 설명해내는데, 이는 낙태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윤리학적인 비판을 통해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이루어진다.

 

먼저, 톰슨은 자궁에 착상된 수정란이 어느 시점부터 인간이 되는가에 대한 견해는 대단히 다양하지만, 단지 인간이 되는 시점을 특정지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궁에 착상된 시점부터 태아를 무조건 인간으로 보자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는 명백한 논리 상의 오류라는 것이다. 하지만 톰슨은 가장 강경한 낙태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따라서, 태아가 착상된 순간부터 인간이 된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박탈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톰슨은 여기서 바이올린 연주자의 비유나 인간 씨앗의 비유 등 굉장히 재미있는 비유들을 여러 개 사용하는데, 이건 톰슨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동시에 발목잡힐 지점이 되는 것 같다.)

 

톰슨이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생명권, 권리, 제 3자의 개입. 우선 생명권을 논하는 데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A는 인간이다'가 즉 'A는 어떤 상황에서든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있을 권리가 있다'고 해석하곤 하는데, 톰슨은 이를 잘못된 이해라고 지적한다. 톰슨이 보기에 생명권이란 단지 '부당한 죽음을 당하지 않을 권리'일 뿐, 타인의 몸에 대한 사용권 내지 사용 연장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비유가 여기서도 활용되는데, 만약 당신이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납치되어 바이올린 연주자의 생존을 위해 혈액을 제공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 누구도 당신에게 '그 파이프를 뽑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부당한 일이다. 당신은 연주자를 살려두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태아가 생명권을 가지기 때문에 여성이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임신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물론 여기서 지적할 만 한 부분이 하나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비유에서 당신은 일방적으로 납치를 당했지만, 강간이나 특수한 상황 하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섹스를 즐기고 임신을 한 여성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톰슨은 '인간 씨앗'의 비유를 통해 이 또한 반박하는데, 만약 인간 씨앗이 공기 중을 돌아다니고 그것이 당신 집의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와 씨를 내렸다고 해서 그것이 곧 당신이 아기를 원하고 받아들였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냐는 것이다. 인간 씨앗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을 닫고 꽁꽁 테이핑을 하고 항균처리를 하는 등의 처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이 인간 씨앗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며, 이는 임신중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제 3자의 개입에 대하여 톰슨은 임신중절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쟁 지형을 날카롭게 파악해 낸다. 임신중절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머니 자신이 무엇을 해도 되는지가 아니라, 제 3자인 우리가 무엇을 해도 되는지에 초점을 맞춰 왔다. 낙태에 대한 여성의 요청이 있고 낙태는 분명 여성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서 발화의 자격을 빼앗고 제 3자끼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이야기해 왔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무엇을 해도 되는가 라는 질문은 이 질문이 끝난 이후에야 간신히 허용된다. 이는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 톰슨은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그토록 확고하게 태아에게 있다고 고집한, 사람이라는 바로 그 지위를 어머니에게 주기는 거부하는 꼴이다(23)."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신중절에 대하여 임신중절을 택하는 것은 태아를 직접적으로 죽이는direct-killing것이기 때문에 할 수 없고, 설령 임산부가 이로 인하여 목숨이 위험하다 해도 결국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직접적 살해를 피하기 위해 여성의 간접적인 살해를 용인하는 일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얘기는 하지만 실상 임신중절의 문제에 끼어들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사실 여성이 "이 몸이 나의 몸이다"고 외치며 몸의 자율권을 되찾겠다고 했을 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며, 손 놓는 척 하면서 법률을 통해 여성의 자율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을 그저 관망하며 간접적 살인을 옹호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 3자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뒤에서 톰슨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최소한도로 멀쩡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고 온다. 우리 사회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생명이 달린 문제에도 무조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톰슨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법이 아니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누군가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는 법의 강제를 받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누군가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도록 강제되는 상황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이다. 다시 말해 이 지점에서 제 3자의 개입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타인의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르기를 도덕적으로 요구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 희생에 생명 자체가 포함되지 않을 때조차 그렇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앞서 본 바와 같은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없다면? 만약 그가 자신을 구해달라고 우리에게 호소한다면? (...) 벌써 지적해야 했겠지만,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당신의 몸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신으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강제하는 일에 우리가 응할 필요가 없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당신이 청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부당한 지점은 없다(72-77)."

 

요컨대, 제 3자의 개입이 요구되는 지점은 앞서 말한 "낙태를 요청한 여성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낙태를 요청하는 여성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부당한 요구를 받고 있고, 우리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성이 요청한 일을 당연히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태아에 대한 부당한 처사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임신중절의 논의 지형 자체를 잘못 파악해 온 것이며, 당사자인 여성과 태아 간의 관계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또한 제대로 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톰슨의 글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우선 첫째는 톰슨이 여성과 태아를 각각 위협받는 자와 위협하는 자로 설정하고, 양자는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상호 '무고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혜정은 어머니와 태아는 상호의존적 관계이며, 그 안에는 깊은 감정적 유대가 존재한다고 본다. 자율성 투쟁의 관점에 따라 서로를 대립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이 지점부터 아마 우리 사회는 동의하지 않을 성 싶은데, 지금까지 한국의 대중 정서와 이를 반영한 법체계는 임신한 여성을 이미 '벌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취급해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무고한 태아와 달리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데, 이는 비혼 여성에게 강제되어 온 순결에 대한 요구 때문일 것이다. 비혼 임신 여성은 이미 순결의 책무를 져버리고 몸을 함부로 굴린 '괘씸한' 여성으로 낙인찍힌다. 거기다 임신중절 요구를 한다면 그는 순결하지 않고 괘씸한 여성일 뿐 아니라, 자신의 행위(상시적 임신가능성을 수반하는)를 나몰라라하는 무책임한 여성이 되고, 감히 어머니가 되어서 태아를 죽이겠다는 비인간적인 인간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여성의 신체적 자율권에 대한 논의는 끼어들 여지도 없다. 이미 도덕적 지위를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여성은 어떤 벌이든 달게 받아 마땅하므로 인간의 기본적 자율권이 보장되고 있는가의 여부는 전혀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임신한 여성은 무고하고 죄가 없다. 낙태를 요구하는 여성은 부도덕하다고 이야기하지만, 단지 임신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여성에게 부도덕의 낙인이 씌워졌다면 이는 뭔가 시작부터 이상한 게임에 불과했던 것이다. 

 

또 제 3자에 대한 언급 역시 인상적이었는데, 임신중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째서인지 임신 당사자인 여성이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는 밀쳐두고 우리끼리 법이니 도덕이니 정의니 온갖 얘길 해 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임신가능성을 가진 나조차도 임신중절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 왔지, 당사자들의 요청에 대하여 "어떻게 응해야 하는가"는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관점의 변화다. 

자율성을 옹호하는 입장이 갖는 한계는 분명 존재하지만, 현재 사회에서 가장 익숙한 논리인 만큼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꽤 효과적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책을 보고 재밌겠다 싶어서 읽어 본 것인데, 낙태죄를 둘러싼 윤리학적 논쟁의 양상이 생각보다 흥미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거와 통, 마르코비츠, 길리건 등의 글을 한 번씩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