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우디 앨런이라는 영화감독은 자신의 유명한 영화 <애니 홀>에서 첫 대사로 이런 말을 한다. “한 식당에서 두 할머니가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 중 한명이 말하죠, ‘여기 음식은 너무 맛이 없어.’ 그러자 또 한 명이 맞장구 칩니다, ‘그래 게다가 양도 너무 적어.’ 제가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인생에는 온갖 고통과 비참함이 가득차있죠. 게다가 너무 짧아요.” 염세주의자나 비관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잘 안다. 무심코 종이 한 장을 집어들다가 생긴 작은 상처에서부터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중압감까지, 고통은 거의 무한대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재밌게도 고통은 그냥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자신의 경우의 수 만큼 다른 부수적인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문학이다. 장정일이 자신의 어느 시에서 나비를 수집하는 사람처럼 희귀한 나비를 찾을 수는 없지만 수집가의 기쁨을 위해서 시를 쓸 수는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이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반대로 문학을 통해서 고통을 잠시 잊거나 치료하기도 한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첫 장편 소설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은 바로 이런 이유로 매우 위대한 소설이다. 자신의 안락하고 작은 집에서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플 수 밖에 없는 열렬한 주인공’들이 나오는 연애소설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소망인 노인이 주인공인데(그의 이름은 정말 너무 길고 이국적이어서 완벽하게 기억하기 힘들다.) 그의 삶은 점점 고단하기 짝이 없어진다. 유유자적하고자 하는 그를 세상은, 엄밀히 말하면 문명은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가 정글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자기 집에서 사는 법처럼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양키들을 덮치는 암살쾡이를 처단하러 가는 길에 반드시 동행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풀베다가 노인의 심리를 낱낱이 파헤쳐 그의 괴로운 독백이 소설 속에 가득하다거나, 노인이 결국 살쾡이를 살려주고 양키들을 몰래 처단한다면 그건 정말 헐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나처럼 순진한 독자가 읽는 도중 가질 법한 깜직한 열망일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된다면 독자인 나의 마음이 편하긴 할테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정글에서 살아남는 노인과 죽어가는 살쾡이와 자연 안에서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문명의 무력함(그리고 그 무력함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문명의 야만성과 지배력)을 독자가 고통스러울 지경으로 직시하고 있다. 노인은 고통으로 흐느끼기는커녕 소설 내내 의연하다. 그는 양키들에게 협조하진 않지만 행로를 방해하지도 않으며 살쾡이를 적대하지는 않지만 결국 죽인다. 호들갑스레 문명을 미워하지도 않고 자연을 숭배하지도 않는다. 그는 한명의 인간으로서 살아있는 하나의 종種으로서 생존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고통은 더욱 커진다. 결국 문명은 자연을 이 지경으로 몰고 왔기 때문이다. 문명은 패배했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었다지만 결국 문명이 자신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아는 순간, 지독한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현명한 노인이었는지,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깨닫고는 암살쾡이를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아마존 강으로 흘려 보낸다.

독서를 끝낸 후에 당연히 있어야 할 기쁨이 없다. 작가는 독자인 나에게 ‘이미 인생은 패배했다’고 말한다. 결코 우리는 삶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다시 산다. 노인처럼 나는 두 사람이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으며 열렬히 사랑하는 연애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책을 덮고 삶 속으로 돌아간다. 재밌게도 인간들의 온갖 능욕을 견뎌낸 살쾡이가 인간에게 ‘다시 삶으로 돌아가 문학을 이루어라’ 고 말하는 듯하다. 아마존 정글을 배경으로 노인처럼 한 치 기울음 없이 인간과 다른 종種을 대등하게 다룬 세풀베다는 그의 첫 소설에서 문학이라는 종種에 대한 깊은 고찰 역시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