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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 - 논문들과 연설 하나 수사학총서 13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양태종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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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상학 관련 논문: 1) 기술적인 것/기술화의 현상학적 양상들 2) 존재와 자연의 동일성 문제와 창조적 인간 이념 사이의 관계 3) 철학적 인간학으로서의 수사학 4) 다의성을 향한 언어경향의 미학적 효과 5) 과학적 패러다임을 앞서는 언어적 은유로서의 패러다임 + 연설: 카시러의 역사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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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미학사
엔리코 푸비니 지음, 서인정 옮김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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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푸비니(Enrico Fubini, 1935 ~  : 이탈리아 음악학자, 미학자. 토리노 대학 음악미학 교수)의 고대부터 18세기까지의 음악미학 Estetica musicale dall'antichita al Settecento(1976)과 『18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음악미학 Estetica musicale dal Settecento a oggi(1987, 확장판)을 합본하여 Michael Hatwell이 영역한 The History of Music Aesthetics(1990, Macmillan)의 국역본. 


저자의 시각이 19세기의 고전주의적 해석에 따른 이분법에 치우져 있는 경향이 있다. 원서의 1권이 1976년에 출간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1980년대 이후의 고고학 성과들로 서양 고대사와 문헌학 들은 대폭 수정, 보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저술 시점에는 아직 그 영향이 반영될 수 없었겠다.) 


+

- 역주나 해설은 없다.

- 인용문의 원문이나 참고 문헌의 국역본이 있는 경우에도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단점.  

- 방대한 양이라 판형이 크기도 하지만 활자가 요즘의 책들에 비해 작은 편인 것은 좋았다.   

음악이 오랫동안 즐겼던 특수한 위치는 주로 그것을 알기 위해 요구되는 기법적인 것과 음악이 사용되는 특별한 ‘언어‘ 때문이다. 음악이 나타내는 환상과 극도의 알 수 없음은 무엇보다도 그 표현성 때문이다. 어떤 것을 표현하지만 그 ‘언어‘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을 말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가장 엄격한 형식주의 사상사들조차 음악에 어떤 표현력을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는 듯하지만, 아직 아무도 음악이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는지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음악의 이 신기하게 알 수 없는 표현성은 음악의 의미에 대한 해묵은 문제이다. - P5

음악의 의미 전달 능력에 대한 이 핵심 문제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됐고, 음악과 다른 예술들 사이의 서로 다른 관계들, 그에 따른 예술들 내에서의 음악의 위치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 그리고 음악이 충족시키는 중요성 및 역할과 임무에 대한 것이었다. - P6

그렇다면 음악미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너무 규범적인 정의는 별 의미가 없겠다. 음악미학 역사가의 임무는 음악경험에 대한 연구의 여러 발달단계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 연구의 목표와 의미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 P6

이 모든 것이 어떤 시대들에는 음악문제들을 어떤 각도로 보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시이고 미학역사가에게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는 특별한 분야를 분명히 지시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설명의 예는 음악에 대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중요한 주석서들이 제공하며 플라톤의 [공화국]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다. 이 두 철학자들의 입장에 심각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음악을 그 자체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수단 --- 특수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 안에서 어떤 목표들을 획득하는 수단 --- 으로서 평가하는 데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P6

만약 음악미학이 오늘날 여전히 논의되는 생각들과 태도들의 체계로서 확립된 시점을 정하고자 한다면 18세기로 돌아가 시작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이 시기에 음악미학이 합리주의 및 데카르트 지성주의와 연계되어 힘들게 출현했기 때문이다. - P7

오늘날 음악미학자들이 현재의 새로운 음악 현실들에 관심을 돌리는 일에 느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 연구의 주요 관심사는 결코 18세기 이전에는 명확하게 체계화되지 못했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목표로 아직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다. 즉 과연 있다면 음악이 전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 P7

일부 흥미 있는 새로운 음악미학분야들 언어로서의 음악, 음악기호학, 음악지각의 심리학 등에 주목했고, 종종 다른 연구 분야들에 접속하면서 새로운 측면들 및 분파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이 책은 근본적으로는 음악미학의 역사적 고찰이다. 사실상 음악미학과 이들 관련 주제들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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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상 이상의 도서관 44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 한길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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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저자는, 대상 시기조차 한정하지 않은 채 "일본의 사상"이라는 1장의 제목을 그대로 표제로 붙여 버린 것에 대한 부담감을 고백하고 그 연유를 설명한다. 이는 각기 본문의 한 장씩을 구성하는 기존의 논문 2편과 강연록 2편의 발표 시점(1957-1959년) 이후로부터 원서의 출판 당시(1961년)까지의 사정들과 더불어, "현재로부터 일본의 사상적 과정을 구조화하려는 시도"라는 저술 의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즉, 특정한 '일본철학사'에 대한 개론서가 아니라, "인류의 거의 모든 중요한 사상적 산물을 받아들인" 일본사상의 저장고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자기비판"인 것이다. ("철학"과 "사상"이라는 용어의 문제에 대해서는 권두에 옮긴이의 말에서 꼼꼼히 짚어 준다.) 


 p. 41: 전쟁 체험을 헤쳐나온 한사람의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비판을 근본적인 동기로 하고 있으며, 더구나 30년대부터 40년대에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게 드러난 병리현상을, 단순한 일시적인 일탈 내지는 예외적인 사태로서 과거에 묻어버리려는 움직임에 대한 강한 저항감에 집필되었기 때문에, 그런 병리현상의 구조적 요인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규명하는 것에 자연히 악센트가 주어졌기 [...] 
 p. 44: 새로운 사상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 그 보급도의 놀랄 만한 정도의 빠름이라는 것과, 다른 한편에서의 과거적인 것 -- 극단적으로는 태곳적인 것 -- 의 집요한 지속이라는 것, 그 두 모순된 계기의 상호연관을 지적하고, 특히 그런 연관성이 일본 근대화의 역사과정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해왔는가를 해명하려는 [...] 
 
 저자는, 일본의 사상이라는 하나의 총체적 대상을 상정하여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면서 특정 현상들을 예외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이론신앙"과 같은 태도에 우려를 표한다. 대신, 그것이 전통적인 것이든 외래에서 이식된 것이든 개개의 사상들을 자리매김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 사이의 연관성이 구조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해 왔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저자 자신의 "역사적 관련지음"은 이를 위해 가능한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론"과 그에 대비되는 "실감"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사회과학과 문학(비평)의 이분법적 구도 자체를 회의하는 정도까지는 아닌 듯 싶다. 저자는 과학자로서 엄연히 이론들을 선택하고 그것들을 서로 비교, 분석하는 작업으로 평가받고자 한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신앙"이지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 파악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이론들을 도구로 삼아 추상화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적 현실을 제한적으로 감각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실감이라고 주장한다. 

p. 55: 문제는 어디까지나 초(超)근대와 전(前)근대가 독특하게 결합되어 있는 일본 '근대'의 성격을 우리 자신이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 유럽과의 대비는 그런 한에서 역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본의 '근대'가 독특한 이유는 근대라는 용어가 유럽의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일본에서 사상이라고 하는 것들의 본래적 존재양태가 "대결과 축적 위에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지 않았던" 전통이 있으며, 그러한 구조화를 방해하는 계기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외래'사상에 대비되는 '전통'사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미의 사상문화가 흘러들어오자 "질풍노도"의 "무질서"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유교·불교·신토 등의 비유럽사상들을 전통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로지 편의에 의한 것이다. 

p. 60: 개국이라는 의미에는 자신을 바깥, 즉 국제사회에 여는(開) 동시에 국제사회에 대해서 자신을 국가(國)=통일국가로 선을 긋는다(劃)는 양면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양면의 과제에 직면한 것이 아시아의 '후진'(後進) 지역에 공통된 운명이었다. 그 운명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자주적으로 타개한 국가는 19세기에는 일본뿐이었다. / 그러나 그런만큼 [...] 사상적 전통(중국에서의 유교와 같은)의 강인한 기축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정에 기인하는 문제성이 바야흐로 폭발적으로 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p. 61: 사상의 섭취나 외견적 대결 방식에서 '전근대'와 '근대'가 도리어 연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p. 63: 일정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들어온 다양한 사상이, 단순히 정신의 내면에서의 공간적 배치를 바꿀 뿐이어서 이른바 무시간적으로 병존하는 경향을 가짐으로써, 도리어 그것들은 역사적인 구조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 고바야시 히데오는, 역사는 결국 '생각남'이라는 식으로 가끔 말하고 있다. 

 이러한 "무구조의 전통"이 새로운 사상의 "정신혁명"적 의미에 대한 "불감증" 또는 "필사적 저항"을 현실 순응으로 받아들이는 "기능전환"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외재적 비판은 기껏해야 "문학적이거나 서민적인 비평가의 폭로"일 뿐 진정한(내재적) 비판이라고 할 수 없다. 원리적 차원으로 추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p. 67: 서로 다른 것을 사상적으로 접합시키는 것을 합리화하는 로직(logic)으로서 흔히 유통된 것은, 주지하듯이 무엇무엇은 곧(卽) 무엇무엇, 혹은 무엇무엇은 한 가지(一如)라는 불교철학을 세속화시킨 적용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철학·종교·학문을 -- 서로 원리적으로 모순되는 것까지 -- '무한대로 포용'하여 그것을 정신적 경력 속에 '평화공존'시키는 사상적 '관용'의 전통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것은, 바로 그런 정신적 잡거성(雜居性)의 원리적 부인을 요구하고, 세계경험의 논리적 및 가치적인 질서를 내면적으로 강제하는 사상이었다. / 근대일본에서 그런 의미를 가지고 등장한 것이 메이지의 기독교이며, 다이쇼(大正) 말기로부터의 마르크스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p. 71: 일본에서는 [...] 사상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무섭도록 민감하게, 오히려 사상내재적인 비판에 앞서서 출현하고 있다. 
p. 79: 일본이 '나라를 연' 19세기 후반의 국제사회가 그야말로 정치적·경제적 동향에서도, 그리고 사상·문화의 양태에서도 유럽적 근대의 커다란 전환기에 당장 '위기'를 외쳐대고 있는 여러 징후들이 모조리 그 시기에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현실이 일본의 '근대' 이해에 -- 모방의 측면에서도, 반발의 측면에서 -- 일찍부터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한에서 서구화주의와 더불어 '근대의 초극'적 사상도 거의 동시에 등장하는 운명에 있었다. 
p. 80: 동양에서의 '유럽근대'는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또 구체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결부되어 있는 기계와 기술을 의미하고 있었다. 다만 일본의 경우는 중국의 사상적·문화적 전통에 대한 '전통적' 콤플렉스가 대(對)서양 콤플렉스로 이어졌기 때문에 동양 대 서양의 문제와, 동양에서 '근대'의 챔피언으로서의 일본이라는 문제가 사상적으로 교착되어 있으며, 그것이 훗날 일본이 제국주의적 발전을 이룰수록 허위의식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안이한 동서'종합'관이 발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천 년 동안 문화의 기축을 이루어온 기독교 그리고 그로부터 해방된 근세인식론이 개진한 국가이성의 문제가 전제로 하는 자연법 사상과 같은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일본이 근대국가로서 "창출"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여기에, 천황의 "영원히 절대적인 권한"과 신민의 "막연히 무한한 책임"으로 지탱되는 '국체'라는 "비종교적 종교"가 동원된다. 이로부터 일본의 근대는 특이성을 갖게 되는데, 그 핵심이 바로 그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모순적인 형태의 '헌법정치'이다. 메이지 헌법이 흠정헌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p. 91: 대심원의 판례[1929년 5월 31일 판결)는 "만세일계의 천황께서 군림하여 통치권을 총람하시는" 국가체제, 즉 제국헌법 제1조, 제4조의 규정으로 그것을['국체'를] '정의'하였다. /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국체는 그런 산문적인 규정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과격사회운동취제법안이 치안유지법 및 그 개정을 거쳐 사상범보호감찰법으로 '진화'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국체가, '사상'문제에 대해 외부적 행동의 규제 -- 시민적 법치국가의 법의 본질 -- 를 넘어 정신적 '기축'으로서의 무제한적인 내면적 동질화의 기능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국가권력이 근대자유주의의 전제였던 내부와 외부, 사적 자치와 국가적 기구의 이원론을 뛰어넘어 정통적 이데올로기로의 '충성'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경향이 노골화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일본의 '국체'는 본래부터 철저하게 내면적인 것도 아니었고 철저하게 외면적인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런 '세계사적' 단계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일본의 '전체주의'는 권력적 통합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포용주의'적이어서(익찬체제의 과정이나 경제통제를 보라) 매우 비능률적이었는데, 적어도 이데올로기적 동질화에는 히틀러도 부러워하게 만들 정도의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도 초(超)근대와 전(前)근대는 멋들어지게 결합했던 것이다. 
p. 90: 권위와 규범, 주체적 결단과 비인격적 '전통'의 구속이 미분화되고 결합하여, 양자택일을 묻지 않는 곳에 그야말로 '이에'(家)·동족집단 혹은 '향당(鄕黨)사회'(伊藤博文)와 연결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포용성'과 '무한정성'의 비밀이 있었다. 
p. 95-96: 메이지 헌법에서 [...] 원로·중신 등 초헌법적 존재의 매개에 의하지 않고는 국가의사가 일원화되지 않는 체제가 만들어졌다는 것도, 결단 주체(책임의 귀속)를 명확하게 하는 것을 피하고 '상호의존'의 애매한 행위연관 -- 미코시(神輿: 신을 모시는 가마) 메는 것으로 상징된다! -- 을 좋아하는 행동양식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 [...] 앞에서 말한 무한책임의 엄중한 윤리는, 이런 메커니즘에서는 거대한 무책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중간세력은 유럽의 귀족만큼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체계의 정당성을 판정하는 근거를 국민들이 스스로의 손에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상"을 결여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위로부터 하강해가는 "기능적 합리화에 기초한 권한계층제" 그리고 저변에서 향촌의 가부장적 인간관계가 대기업 등의 사회조직이나 국가기구의 내부로 전위해가는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의 공동체적 규제, 이 양극을 무한왕복하면서 일본의 근대국가화가 진행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p. 103: [...] 국가권력에 대한 사회적인 바리케이드가 얼마나 본래적으로 취약했는지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입신출세'의 사회적 유동성이 아주 이른 시기에 성립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정치·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근대일본은 갑자기 출세한 사회이며(지배층 자신이 대부분 벼락출세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주화를 수반하지 않는 '대중화' 현상도 테크놀러지의 보급과 더불어 비교적 일찍부터 현저해졌다. 
p. 104: 그런 양극의 중간지대에서의 스피디한 '근대화'는 제도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그 정점과 저변의 양극에서의 '전근대성'의 온존(溫存)과 이용에 의해 가능해졌던 것이다. 그럴 때 저변의 공동체적 구조를 유지한 상태로 그것을 천황제 관료기구에 연결시키는 기능을 법적으로 가능하게 한 것이 야마카타 아리토모가 추진한 지방'자치제'이며, 그 사회적 매개가 되었던 것이 그런 공동체를 기초로 하는 지주=명망가 지배이며, 의식적으로 그런 결합을 이데올로기화한 것이 이른바 '가족국가'관에 다름 아니다. 
p. 107: 근대화에 의해 자칫하면 무너지기 쉬운 그런 밸런스를 위로부터의 국체 교육의 주입과 아래로부터의 공동체적 심정의 흡인에 의해 끊임없이 조정하는 것이 거기서의 '통치기술'에 다름 아니었다. 
p. 112: 한편에서 '한계'의 의식을 모르는 제도의 물신화화, 다른 한편에서 규범의식으로까지 자신을 높이지 않는 '자연상태'로의 밀착은 [......] 애초에 일본의 '근대' 그 자체에 내재하며 미묘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던 계기의 양극화이며, 곧 일본에서의 '제도'와 '정신'의 구조적 연관이 인식론적 측면에서 양극으로 표현된 형태에 다름 아니다. 

 + 

 1961년 출판된 『日本の思想』의 1996년 국역 초판본의 2012년 (아마도 번역 수정은 없는) 2판. 
 번역체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본래 문체 자체가 대화체로 논파해 나가는 성격이 있기 때문에 다소 구술적인 원문의 일본어 형식을 최대한 살려 놓자는 취지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주로 조사가 어색하거나 생략되어 있어서 또는 부사의 위치가 부적절해서 얼핏 마치 비문인 듯이 느껴지는 문장이 종종 나오기 때문에, 만연체로 긴 문장의 정확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어 번 다시 읽게 되는 불편이 있다. 
 판형에 비해 활자 크기가 큰 편. 겉표지의 그림이 양장 속표지에도 인쇄되어 있고, 보람줄이 달려 있다. 
 공인(?) 필독서인데다가 제본이 좋은 편이고 아직 전자책으로 나오지 않아 종이책 구입 가치가 있다. 


개국이라는 의미에는 자신을 바깥, 즉 국제사회에 여는(開) 동시에 국제사회에 대해서 자신을 국가(國)=통일국가로 선을 긋는다(劃)는 양면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양면의 과제에 직면한 것이 아시아의 ‘후진‘(後進) 지역에 공통된 운명이었다. 그 운명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자주적으로 타개한 국가는 19세기에는 일본뿐이었다. - P60

서로 다른 것을 사상적으로 접합시키는 것을 합리화하는 로직(logic)으로서 흔히 유통된 것은, 주지하듯이 무엇무엇은 곧(卽) 무엇무엇, 혹은 무엇무엇은 한 가지(一如)라는 불교철학을 세속화시킨 적용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철학·종교·학문을 -- 서로 원리적으로 모순되는 것까지 -- ‘무한대로 포용‘하여 그것을 정신적 경력 속에 ‘평화공존‘시키는 사상적 ‘관용‘의 전통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것은, 바로 그런 정신적 잡거성(雜居性)의 원리적 부인을 요구하고, 세계경험의 논리적 및 가치적인 질서를 내면적으로 강제하는 사상이었다. [...] 근대일본에서 그런 의미를 가지고 등장한 것이 메이지의 기독교이며, 다이쇼(大正) 말기로부터의 마르크스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 P67

동양에서의 ‘유럽근대‘는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또 구체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결부되어 있는 기계와 기술을 의미하고 있었다. 다만 일본의 경우는 중국의 사상적·문화적 전통에 대한 ‘전통적‘ 콤플렉스가 대(對)서양 콤플렉스로 이어졌기 때문에 동양 대 서양의 문제와, 동양에서 ‘근대‘의 챔피언으로서의 일본이라는 문제가 사상적으로 교착되어 있으며, 그것이 훗날 일본이 제국주의적 발전을 이룰수록 허위의식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안이한 동서‘종합‘관이 발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P80

과격사회운동취제법안이 치안유지법 및 그 개정을 거쳐 사상범보호감찰법으로 ‘진화‘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국체가, ‘사상‘문제에 대해 외부적 행동의 규제 -- 시민적 법치국가의 법의 본질 -- 를 넘어 정신적 ‘기축‘으로서의 무제한적인 내면적 동질화의 기능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국가권력이 근대자유주의의 전제였던 내부와 외부, 사적 자치와 국가적 기구의 이원론을 뛰어넘어 정통적 이데올로기로의 ‘충성‘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경향이 노골화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일본의 ‘국체‘는 본래부터 철저하게 내면적인 것도 아니었고 철저하게 외면적인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런 ‘세계사적‘ 단계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 P91

일본의 ‘전체주의‘는 권력적 통합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포용주의‘적이어서(익찬체제의 과정이나 경제통제를 보라) 매우 비능률적이었는데, 적어도 이데올로기적 동질화에는 히틀러도 부러워하게 만들 정도의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도 초(超)근대와 전(前)근대는 멋들어지게 결합했던 것이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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