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삼성 미리 연루자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이들이라면,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라도 물러나게 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삼성의 선택은 반대였다. 윤종용, 황창규 등 삼성을 대표하는 간판급 경영자들이 쫓겨났지만, 비리 연루자로 언론에 보도된 이들은 살아남았다. 심지어 구조본의 지시에 따라 고객 돈을 비자금으로 빼돌렸던 황태선 전 삼성화재 사장에게는 막대한 스톡옵션이 보장됐다. 이게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차명계좌에 담긴 돈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삼성 조직 안에 알리는 신호다. 그리고 이건희 일가를 위한 일을 하다 입은 상처는 더 높은 자리와 돈으로 보상한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회사의 위상을 높이는 일보다 이건희 일가를 보호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101쪽
검사는 시시한 혐의로 사람을 잡아들인다. 그리고 검사와 친한 변호사가 사건을 맡도록 한다. 변호사는 두둑한 수임료를 챙긴다. 검사, 변호사와 친한 판사는 피의자를 풀어준다. 덕분에 한몫 챙긴 변호사는 술자리에서 판사, 검사에게 크게 한턱 대접한다. 그리고 얼마 뒤 검사는 다시 사람을 잡아들이고, 악순환은 반복된다. 이 사건을 수사하며, 법조 삼륜이 공모한 공갈극을 보는 듯했다. -120쪽
당시 한 음식점에서 이학수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만났다. 이학수는 건강상의 이유로 날생선을 기피하므로, 화를 살짝 익혀서 먹는다. 그날도 그랬을 게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홍석현은 이학수가 자기보다 힘의 우위에 있다는 점을 선선히 인정하고 있다. 홍석현은 이건희의 매제이며 보광그룹 소유주지만, 이학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27쪽
삼성 공장 관할 관청 공무원을 매수해서 노조 설립 신고서를 아예 수리 자체가 되지 않도록 했다. 매수된 공무원은 신고서가 들어오면, 신고서 수리를 일단 미루고 바로 삼성에 알려줬다. 그러면 삼성은 재빨리 유령노조 설립 신고를 했다. 이런 작업은 구조본뿐 아니라 계열사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계열사마다 노조 담당이 있었고, 이들은 노동자들을 면밀하게 감시했다. 노동조합 설립 기미가 보이면, 관련 주동자를 사실상 납치해서 회유, 협박했다. 이런 식으로 한 명씩 각개격파하면, 결국 노조 설립 시도는 불발로 끝나곤 했다. -139쪽
삼성 구조본 인사팀에는 경찰대 출신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삼성은 경찰을 잘 활용했다. 예컨대 누군가에 대해 휴대폰 위치 추적을 해야 한다면, 구조본 인사팀과 연줄이 닿는 경찰에게 미리 청탁해 둔다. 경찰서장 명의로 통신회사에 공문을 보내면, 휴대폰 개설 명의자를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 경찰은 청탁받은 조사에 관한 서류를 다른 정상적인 수사에 관한 서류 사이에 끼워서 경찰서장에게 결재를 받는다. 이렇게 경찰서장 도장이 찍힌 공문이 나오면, 이를 휴대폰 위치 추적에 이용하는 것이다. -140쪽
삼성은 직원에게 무한한 도덕성을 강요한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면,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3만 원짜리 신용카드 전표가 문제가 돼 해직된 직원의 눈에, 10조 원대 회사 돈을 빼돌린 이건희 일가가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다. -166쪽
대법관에게 150만 원짜리 굴비 선물세트를 보낸 일도 있다. 당시 이학수는 내가 직접 전달하라고 했다. 그게 예의라는 게다. 그러나 나는 운전 기사를 대신 보냈다. 속으로는 ‘대법관이 설마 삼성이 보낸 굴비를 받겠느냐’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기사에게 들으니, 굴비 잘 먹겠다고 감사 인사를 하면서 받았다고 한다. 물론, 굴비를 받은 대법관은 그게 대가성 있는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대법관에게 고작 150만 원짜리 뇌물을 보낼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저 사교 활동의 일부라고 여기고 넘겼을 게다. 하지만, 이처럼 무딘 태도가 큰 비리로 이어진다. 작은 향응과 선물에 길들여지면, 결국 뇌물도 받게 돼 있다.-172-173쪽
삼성 돈을 받은 검사 명단에 포함돼 있던 이귀남(현 법무부 장관)도 당시 산행에 동행했다고 한다. 이귀남이 풀이 죽은 표정을 짓고 있자, 정상명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삼성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이귀남을 위로했다고 한다. 현직 검사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특검에서 조사받을 당시, 수사검사도 이런 내용을 내게 확인해 줬다. "위로하려고 한 말일 뿐"이라는 설명이 뒤따랐지만, 사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74-175쪽
삼성 법무실 시절, 김인주가 내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몇 천만 원 주는 걸 무얼 그리 겁내느냐"라고. "이삼천만 원 때문에 벌벌 떨지 말라"고도 했다. 실제로 그들은 공직자에게 뇌물을 뿌리는 일에 대해 죄책감이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이건희, 이학수 등 조직 수뇌부가 자신을 신임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런 비밀스런 업무를 담당했던 자들은 능력이 없어도 계속 중용했다. 잘못을 저질러도 어진간해서는 잘리지 않았다. 비리 공범을 함부로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175쪽
삼성에서 겪은 로비 문화를 떠올리면, 망국적인 입시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졸업생이 권력기관으로 많이 진출하는 학교에 자식을 입학시키려는 욕망이 이유다. 그래서 자기 자식이 권력자들과 학연으로 묶이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맥으로 자시들이 불공정한 혜택을 누리길 원하는 게다. 이런 욕망이 있는 한, 입시경쟁이 사라질 리는 없다. 그런데 입시경쟁은 거품을 물고 성토하면서, 불법 로비에는 관대한 이들을 종종 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181쪽
중앙일보가 삼성으로부터 계열분리하겠다고 대국민 선언을 한 게 여러번이었다. 하지만 홍석현 회장에게는 대주주 지분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이건희 회장이 명의 신탁하는 방안을 택하기로 했다. 주주 명의자는 홍석현으로 하되 의결권은 이건희 회장이 행사한다는 내용으로 비밀 계약서를 썼다.-192쪽
‘e 삼성’에 문제가 생기자, 김인주가 초조해졌다. 걸핏하면 내 방에 와서, 내 뒷자리에서 서성였다. 방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그는 "이재용 돈이 들어갔는데, 손실이 나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을 거듭했다. 결국, 그는 ‘e 삼성’ 관련 주식을 취득가액으로 사서 투자 원금을 회수하도록 했다. 그래서 삼성 계열사들이 ‘e 삼성’ 관련 주식을 사서 손해를 뒤집어썼다. -204쪽
이건희 집안 파티에 불렀을 때 거절하는 연예인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예외가 있는데, 가수 나훈아 씨다. 삼성 측에서 아무리 거액을 주겠다고 해도, 나훈아를 초청할 수는 없었다. 나훈아는 대략 이런 입장이었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음녀, 공연장 표를 끊어라." 한마디로 부잣집 애완견 노릇은 하기 싫다는 것이다. -228쪽
당시 이건희는 삼성 고위 임원,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으로 성공한 사람, 문화, 학술계 유명인사 등을 입주 자격으로 내세웠다. 이건희는 일종의 우생학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뛰어난 사람들을 따로 골라내서, 그들이 대중과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순수혈통을 고집하는 배타적인 인종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태도인데, 아마 이건희가 생각하기에 가장 우월한 인종은 삼성 고위 임원이었을 게다. -247-248쪽
자신이 법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못 할 짓이 없어진다. 그날, 그(이재용)는 "비자금이나 차명계좌는 모든 기업이 공공연하게 갖고 있는 것인데, 왜 삼성에 대해서만 문제 삼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짜증스러워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재용이 범죄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53쪽
섭외, 즉 뇌물을 통한 불법 로비에 대해 이건희가 가진 관심은 대단했다. 그는 평소 "작은 돈으로 큰 결과가 오게 하는 것"이 로비라고 말했다. 로비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까지 지시하곤 했다. 그는 종종 로비 대상자에게 ‘감동 서비스’를 하도록 주문했다.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 등을 꼼꼼하게 챙기고 ‘꽃과 와인’을 집에 보내서 ‘감동’을 주라는 것이다. -256쪽
이재용으로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그룹에 민형사 사건이 많아지자, 법원행정처 출신으로 대법관 물망에 오를 만한 판사를 스카우트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법관 인사를 주무르는 법원행정처가 사법부를 장악하기 위한 핵심 열쇠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게다. 그런데 이런 지시가 제대로 이행이 안 됐다. 그러자 구조본 기획팀에서는 법원행정처 소속 일반 직원이라도 스카우트하자는 견해를 내기도 했다. -258쪽
더 무서운 것은 국민들의 냉소다. 사법부가 공정성을 잃고 정권과 재벌의 시녀 노릇에 전념한다는 생각이 워낙 뿌리 깊은 까닭에, 신영철 사태에 대한 판사들의 집단 반발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들이 많았다. "법원은 원래 그렇다. 어차피 한통속인 판사들이 왜 뒤늦게 호들갑이냐"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위험하다. 썩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현실 앞에서 체념하고 냉소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절망적이라는 게 희망을 포기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체념과 냉소를 전염시키는 일 역시 부패의 공범이다. "다 그런 거지"라는 체념과 냉소 속에서 부패는 관행이 되고, 결국 거스를 수 없는 구조가 된다. 지금이 그런 상태다. "어차피 한통속이면서 왜 호들갑이냐"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지지할 수 없었던 이유다. -386쪽
진실로 인간성이 좋은 사람은, 욕을 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옳은 일을 하는 이들에게서는 칭찬을 듣고, 나쁜 짓을 하는 이들에게서는 욕을 먹는 사람이 대개는 옳은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간성이 좋다"는 평가는 이런 이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조차 칭찬 듣는 사람을 오히려 높이 치는 분위기가 짙다. 이런 사람들이 ‘의리’가 있다거나, ‘보스’기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부류를 가리켜 ‘남자답다’거나 ‘통이 크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쩨쩨하지 않다’거나 ‘대범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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