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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트] [BL] 중력 (외전 포함) (전5권)
쏘날개 지음 / 블루코드 / 2018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재희는 기형도 시인을 닮았어요. 어쩌면 윤동주 시인 또한 겹쳐 볼 수 있겠네요.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오래된 서적, 기형도>
해일처럼 끝없이 직진하는 차학윤 앞에서 수십 번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재희를 보며 마음 한 켠으로는 안쓰러웠고 또 다른 한 켠으로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늪지와 같은 절망 속에 빠져들어가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견디고, 벼텨내기는 몹시 힘드니까요. 학윤이와 재희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깊은 골이 있지만 그럼에도 둘은 함께하고, 서로를 위하리라는 미래가 선명해서. 외전에서의, 여전히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다정한 둘의 모습이 이리도 기꺼울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침착하게 말을 꺼내지만, <중력> 본문을 읽는 동안에는 내내 술이라도 한 잔 들이킨 기분이었습니다. 활자를 좇아 시선이 움직임에 따라 홧홧하게 달아오른 귓등, 바위라도 얹힌 듯 매여오는 목. 재희가 스스로를 저며내고, 주변 인물들이 그러한 재희를 안타깝게 여길 때마다 달아오르는 눈시울을 내리 누르느라 꽤 용을 썼습니다. 작가님께서는 SNS 상에서 재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무던히 노력하셨다는 말씀을 꺼내셨는데 오히려 그러하였기 때문에 재희가 얼마나 고통에 몸부림치는지, 제 안의 어둠에 스스로 잠겨 들어가는지 더욱 선명하게 보여서, 책을 펼친 이후부터 계속 숨이 막혔습니다.
초반에는 재희의 비정상적인 자괴감과 자기혐오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무척이나 감각적이며 시적인 표현 속에서 재희는 그저 자신의 불행만을 바랄 뿐이었고, 제게 주어지는 호의마저도 의식적으로 쳐내고, 거절했어요. 따듯한 가정에 적응하지 못해 정성이 담긴 식사를 죄 토해내고, 궁핍한 재정을 핑계삼아 몸과 건강을 챙기지 않으며. 오래 지나지 않아 직접 밝힌 재희의 과거-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전적-를 보고서도 이상하다고 느껴질 만큼 필사적으로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학윤이가 자신의 가정을 망가뜨린 재희를 온전하게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해요. 자처하여 가시관을 머리에 쓰고,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서 주저앉은 사람을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을까요.
학윤이는 동화나 만화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구원해주는 왕자님도 아니고, 원수와 악을 무조건적으로 포용하는 대인배도 아닙니다. 재희는 자신이 겪어야 했던 절망과 고통을 끝없이 속죄하며 어깨에, 등에 이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하였기에 차학윤 또한 끝까지 재희를 용서하지 못한 동시에 포기할 수 없었어요. 자신이 차학윤의 가정을 부수었음을 모르던 이전에도 때때로 제 죄에 짓눌려 무너지고는 했으며,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학윤을 끊어내려 부던히도 노력한, 그러한 재희를 알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잔인한 현실이에요. 둘은 존재만으로도 서로를 찌르고 할퀴는데도 정작 그러한 서로가 서로의 역린이라니. 파국으로 치닫아가는 예정된 비극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쏘날개 작가님의 <중력>을 성장소설이라고 바라보아도 괜찮을까요. 이것만은 감히 확언을 내뱉기가 힘들어지네요. 속에서 곪아가는 상처를 치유하려면 우선 환부를 째 고름을 빼낸 뒤 봉합하고, 약을 바르고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5권의 대장정 속에서 재희는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의도치 않게 강제적으로 갈라내어 문드러진 속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습니다. 물론 어떠한 말로 포장하였든간에 학윤이는 재희의 곁에 남기로 선택했으며,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고양이 '미'도 다시 돌아왔으니 앞으로 남은 일이란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낫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지만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둘은 수없이 서로의 환부를 헤집을테지만 그 이상으로 상처를 핥아주고, 다독여 줄테니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둘 다 과거를 딛고 성장하리라는 믿음을 가져도 괜찮을까요.
물론 '성장'이라는 단어를 염두하여 되짚을 때 학윤이를 빼놓을 수 없지요. 재희의 시점에서 진행되었던 만큼 <중력>의 본문에서는 재희의 고통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만, 동시에 학윤이의 상처도 재희의 담담하게 가라앉은 시선을 통해 보여줍니다. 4권에서, 애써 사실을 외면해보려는 학윤이를 붙잡고 재희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현실을 되새겨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증오하라고 강요한다니, 왠만한 용기와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지요. 재희도 학윤이가 받은 상처를 외면할 수 없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학윤이가 자신을 끝내 포기하지 못했듯이, 재희도 차마 학윤이에게 애정을 받을 수 없었던 걸까요.
상대적으로 좀 더 강단있고, 다부질 뿐이지 학윤이 또한 곪고서 곪은 상처로 가득한 사람이니만큼 과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고통이 가득하겠지요.
'그에겐 내가 숨을 참고 통과해야 할 어두운 터널이었다. '
재희의 혼잣말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대사 중 하나를 가져와보았습니다.
“네 손에 들어가는 것들은 신기하게도 제대로 남아나질 않네.”
'미'를 잃은 재희에게 학윤이가 한 말입니다. 어쩐지, '네 손에 들어가는 것들'에 학윤이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는 기분은 그저 제 착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