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소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 눈에는 뛰어난 사회고발적 문학이자 성장소설입니다.

[전자책] [BL] 레인보우 피쉬 1 ㅣ [BL] 레인보우 피쉬 1
그루 / 비하인드 / 2016년 8월

제 집중력이 꽤 좋은 편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레인보우 피쉬를 읽으면서는 몇 번이고 쉬어야 했어요. 어느 정도 읽다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읽고서, 또다시 쉬기를 반복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루님이 그려내신 세상은 끔찍하도록 현실과 닮아서,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분들의 서평을 쭉 읽어보았는데, 이 점을 짚어주신 독자분께서 없어서 부족하지만 제가 감히 무어라 이야기 해 보렵니다.

주인공인 태경이가 사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한국의 불편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어요.
•자식을 그저 도구로 이용하는 부모(할머니)의 모습, 그러한 부모(할머니) 아래에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자식.
•자식을 사랑할 수 없는 부모와 그런 부모를 지켜보며 자라오는 자식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회적 성별과,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생물학적 성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
•사회적 약자인 트렌스젠더와 동성애자를 향하는 저열한 혐오와 악의.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그것을 받아내야 하는 소수자들.
•호의에서 비롯되었다지만, 자신보다 불우한 사람을 향한 근본적이고도 본능적인 비웃음과 우월감. 숨쉬듯 자연럽게 녹아있는 폭행과, 그로 인해 약자가 감내해야 하는 모멸감.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폭력.


띄엄띄엄 읽은 탓인지 간추리려고 하니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을 짚어보자면 저 정도가 되겠네요. 우리 한국 사회의 고질적이면서도 뿌리 깊게 박힌 혐오와 폭력을 짧은 내용 속에 너무도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녹여낸 작품이라 읽으면서 몇 번씩 놀라고, 몇 번씩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 할 것이 너무 많은, 무척이나 대단한 작품인데, 제가 느끼는 이 감상을 어떻게 풀어내어야 다른 분들 또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 또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기에, <레인보우 피쉬> 내의 트리거가 당겨지는, 힘든 기억이 떠오르게 만드는 내용이 너무나도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부디 깊게 생각하며 읽었으면 할 뿐입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며, 우리는 보통 즐겁기 위해 소설을 읽기 때문에 보통 소설 속의 세상은 현실과 다릅니다. 미화를 거쳐 좀 더 긍정적이고, 밝고, 이해심과 포용력이 넘치지요. 동성애자인 주인공의 주변에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친구들, 부모님이 계시며, 그 사랑은 보통 쌍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레인보우 피쉬>는 현실과 닮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더니 폭행당하고, 퇴학당한 아청.
"미친 호모 새끼가, 쳐 돌았나?" "뒤지게 맞기 전에 꺼져. 존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고등학생 시절, 람호에게 고백한 태경이 들은 폭언.
“너나 뒷구멍 조심해라, 여기 계속 있다간 존나 털리겠는데.” “어디서 똥냄새 안 나냐?” “누가 질질 흘리고 다니나 보지.” 일면식조차 없는 동성애자를 향한 저열한 조롱과 혐오. 자신이 강자임을 알기에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욕설.
세나의 정체성을 억누르고, 무시하고, 수술을 원하는 세나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이게 전부 당사자를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세나의 아버지.
친근감의 표현이라며 자신보다 약자이고 어린 학생에게 숨쉬듯 손찌검을 하며, 호의로써 "밥 빌어먹는 새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준 은혜를 모른다" 라는 모멸적인 발언을 하는 편의점 주인.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관심을 갖고 싶지조차 않았던 질 나쁜 폭력배들에게 협박당하고 있었다던 뒷사정.

정말, 읽으면서도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레인보우 피쉬>를 읽으며 불편하고, 힘들었으면 했어요. 저러한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많은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했습니다. 몇 번을 고치고 교열한 담담한 말로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저 많은 말을 자연스럽게, 서사 속에서 녹여낸 그루 작가님이 너무도, 너무도 대단했어요.

그러한 입장에서 10년만에 돌아온 람호는, 너무나 이질적이고도 납득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많이 바뀌었습니다. 태경이를 끔찍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소수자들의 시야에는 어떤 세계가 비치는지 알게 되었고,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악의는 찾아볼 수 없게 변했지요. 하지만 1권 초반에서, 람호가 태경이에게 했던 말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너한테 못한 건 뭔데?"
태경이에게 폭언을 쏟아내고, 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던 과거의 자신이 왜 문제인지, 태경이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고, 고민한 흔적조차 없는 너무나도 무책임한 말이었어요.
“애당초 이제 와서 10년 전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어.”
“…뭐?”
“나는 지금 너와 얘기하고 있는 거야.
이 말도, 람호가 자신이 태경에게 남긴 상처에 대해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와닿아서 그저 넘기지를 못했어요. 세상에는 차마 잊을 수 없는 상처가 있고,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자리 걸음만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태경이만 하더라도 그렇게 힘들어하는 사람 중 하나인데. 그저 자신의 입장과 시선만을 강요하니까...


그래도 뭐, 태경이는 람호를 좋아했고 람호 또한 기적적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만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언급이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제가 두 번째로 하고 싶은 말은 태경이의 성장이에요.

태경이는 소위 말하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피쉬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태경이의 능력이 자신의 환경을 불우하게 만드는 데에 한몫을 했지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중에 <유리소녀/베아트리체 알레마냐>가 있습니다. 몸이 유리로 되어있어 자신의 생각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 그로 인해 고통받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핀트가 나간 것 같긴 하지만
태경이는 이 동화의 반전격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바깥에 내보이지 않는 인물들의 감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어머니,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고 싶어했던 람호의 감정, 이성과 감정이 쓰레기처럼 검게 썩어든 '블랙'들.
태경이가 30년의 세월동안 끊임없이 시달려온 열등감과,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러한 환경과 피쉬를 보는 능력, 그 능력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태경이의 태도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해요. 어느 누구도, 낳아준 어머니조차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음을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유일한 위안인 세나에게 매달리고, 원하는 말을 만들도록 유도했으며, 그러한 자신에게 환멸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네가 날 선택해줬으면 했어.”
“그런 건 무서워. 내가 아쉽지 않다는 건,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건, 언제든 나를 끊어내고 가던 길 갈 수 있다는 거잖아. 그건 싫어. 그럴 사람이랑은 애초에 시작을 안 하고 싶어.”
이러한 대사들이 그런 태경이의 상처를 가장 잘 드러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태경이가 피쉬를 상실한 것은 역설적으로 태경이의 성장을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피쉬만을 보고서 모든 사람을 판단하던 태경이가, 진녹색의 피쉬를 보고서 범인이라 단정지었던 학생이 사실은 점주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피쉬는 처음으로 태경이를 떠나갔습니다.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 '피쉬가 전부가 아님'을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어요. 그 이후부터 태경이는 타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합니다. 저는 오히려 그 부분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어요. 공중부양을 하는 능력이 있어 매일을 둥둥 떠다니며 살아오다가, 이제야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모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거든요.
위에서 제가 엄청 욕했던 람호가, 그래도 그러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태경이를 잘 잡아주고 지지해주어서 참 다행이었고 기뻤어요. 본문에서 람호의 말과 표현이 좀 더 자세해졌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걸음마 떼듯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태경이를 배려해 준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태경이의 그 모든 세상과 시야 속에 '태경이 자신'만은 없었는데, 그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모든 피쉬가 사라져버리는 결말은 너무 아름답고도 슬펐어요. 열등감에 시달려 지칠대로 지친 태경이가 드디어 자신을 돌아볼 만큼 성장했구나, 하는 안도도 있었고, 그렇게 성장해나가도록 도와준 사람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람호인 것도 기뻤으며, 그 모든 무지갯빛 피쉬들을 봐 오며 새겨진 상처들이 떠올라 슬펐음에도 불구하고 태경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둔 채,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기에 너무나 환상적이며 설레었습니다. 작품에 있어 가장 최고이자 환상적이고 로맨틱한 결말이었어요.


그루님의 소설은 언제 무엇을 읽어도 깊게 생각하고, 고민해가며 집필했다는 게 느껴져서 정말 좋아합니다. 제가 비록 람호에 대해 혹평을 많이 늘어놓았지만 그 또한 '그루님의 소설' 에 있어 높은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에요. 원래부터 이쪽 장르가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처럼 동화와 같은 환상에 빠진 경우가 많은데, 정말 오랜만에, 깊은 고찰을 거쳐 현실을 담아내었다고 느껴지는 소설을 읽게 되어 몹시 기뻐요.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레인보우 피쉬>를 읽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