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의 색깔들 - 중세의 책과 사랑 엑스쿨투라 4
자클린 세르킬리니툴레 지음, 김준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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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Amuor)와 '리브르'(Livre). 표지에 사용된 이 서체는 15세기 인문주의자이자 도체 도안가였던 조프루아 토리가 창안한 서체를 그대로 빌려다 썼다. 그리고 오른쪽 구석의 유니콘은 서구 중세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동물로, 이 외뿔짐승은 오직 순결한 처녀만이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 두 가지 의 도상물 안에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다 담겨 있는 듯하다. 중세의 책과 그 책을 낳은 중세인의 사랑 말이다. 사실 서양 중세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호기심을 자아낸다. 투구와 갑옷을 입고 말 탄 자들이 아름다운 귀부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무언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그들의 세계는 충실과 헌신으로 채워져 있고, 명예와 신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결연함을 지닌 자, 꼿꼿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자들의 집단도 떠오른다. 서양 중세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사와 여성에 관한 이러한 상식 말고, 우리가 아는 중세의 다른 모습은 어떨까. 이 책은 그것을 이야기한다. 9세기에서 12세기 프랑스 문학이 태동하고 곧이어 프랑스 문학의 꽃이 만개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화는 저절로,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이 시기의 문학은 화려한 성공을 거둔 선대를 극복하고 자기창조의 묘를 발휘하지 않고선 정체성을 획득할 수 없었다.

 

저자 자클린 세르킬리니툴레는 프랑스 학계에서 다섯손가락 안 드는 중세 문학 권위자이다. 중세에 접근하는 통로가 비좁은 우리의 문화 풍토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게 반가운 느낌이 든다. 중세 하면 으레 하위징아나 부르크하르트의 책이 고작인 상황에서 중세 문학, 그것도 로망어의 중심이었던 프랑스 문학의 내적 풍경을 만난다는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자인 김준현 교수는 동세대의 연구자들이 등한시하는 서구 중세의 문학을 전공 분야로 삼아 오래 공부를 거듭한 것으로 안다. 사실 그의 전공 분야인 프랑수아 비용만 해도, 우리에게는 아직 완역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웃나라 일본과의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은 이미 19세기말 20세기초에 비용의 시가 거의 대부분 번역돼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20세기 초엽에 이미 일본인들을 프랑스로 날아가 그곳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마치 자기가 그곳 사람인 양 이국의 정조를 바탕으로 거꾸로 자신의 고향땅 머나먼 섬나라 일본을 노래한 경우도 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의 안목이 이웃나라보다 좁아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 탓이다. 일본의 학문 역량이 우리보다 백년 앞섰네, 오십년 앞섰네 하는 단순한 수치 비교나, 중세 연구자의 숫자가 몇대몇의 비율이니 하는 계량적 비교가 올바른 관점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자조 섞인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크린 세르킬리니툴레의 <멜랑콜리의 색깔들-중세의 책과 사랑>에서 주로 집중하는 14세기는 바로 유럽 남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꽃피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문예부흥의 진경은 후면으로 물러나 있고, 유럽 전역을 아우르며 큰 권위를 누리던 라틴어가 어떻게 각 지역의 토착어로 대체되는지, 그리고 그런 전환기에 프랑스의 문인들은 중세의 단단한 사회구성체에서 자기만의 자리를 넓혀갔는지가 전면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다른 책들과의 상호교차 독서를 통해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할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저자가 한두 줄로 짧게 언급하고 지나치는 구절도, 다시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 컨텍스트를 파악해보면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저자는 구구절절 지리하게 늘어질 만한 상황들을 요령 있게 압축해 밑에 깔고 정말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전업작가가 먹고사는 문제, 오늘날에도 이 예민한 문제가 잠깐씩 도마 위에 올랐다가 사라지곤 한다. 글만 써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참 지난한 일이다. 월급쟁이 생활을 한다거나 날품팔이 생활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정감 있게 삶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창작가는 늘 그런 한계 상황을 기꺼워하며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이지만, 궁핍한 작가에게 양식 있는 후원자가 있다면 자신의 창조성을 더욱 자유롭게 펼쳐 더 많은 성과를 얻는 좋은 환경이 생겨날 것이고, 창작가도 한계 상황을 생활이 아닌 작품 안에다 설정하는 행복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런 창작가와 후원자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하나의 모델을 만날 수 있다.

 

사랑의 궁정이라는 체제. 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던 이 정신의 시스템에서 어떻게 작가가 자기 자신을 독립된 창작자로 인식하게 되는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한 재미가 될 것이다. 군주와 유랑예인들이 모여들고 기사와 귀부인들이 참관자로 참여하던 향연. 사랑의 궁전은 사회적으로는 흑사병과 왕위 쟁탈전으로 뒤숭숭하던 중세 사회의 분열상을 하나로 모으던 방법적 체제였다. 이들이 구사한 방법으로서의 사랑, 이것은 오랜 세월 지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랑, 그리고 그것을 책 속으로 여행, 겨울이 다가오는 이즈음의 멜랑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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