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걸작선 12
필립 K.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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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소설보다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더 유명할 것이다. 어쩌면 영화가 명작이기에 소설도 유명해졌는지도 모른다. 나도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 나서 소설을 읽었다. 그러고 나니 영화의 이미지와 철학, 스토리가 소설을 읽기 전에는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졌고 읽는 동안엔 머릿속에 생생하게 펼쳐지며 소설과 비교되기도, 연계되기도 했다. 소설과 영화의 줄거리는 다른 부분이 많다. 사실 뭘 먼저 보든 상관없지만 난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러면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1992년(영화는 2019년), 지구는 핵전쟁으로 인해 온통 낙진으로 뒤덮인다. 많은 사람들은 화성으로 떠나지만 몇몇 사람들은 지구에 남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주인공인 ‘릭 데커드’는 샌프란시스코 경찰서 소속 수사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구에 몰래 들어오는 안드로이드들을 ‘퇴역’시키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안드로이드는 거대 기업 ‘로즌 조합’이 만든 인간과 거의 비슷한 로봇이다. 그들은 ‘보이드-캠프 기법’, 즉 어떤 질문에 보이는 순간적인 반응으로 인간과의 구별이 가능하지만 기억과 학습에 따라 인간과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진보된 안드로이드의 경우에는 현상금 사냥꾼이 필요한 것이다. 주 이야기는 화성에서 지구로 몰래 들어온 8명의 안드로이드를 퇴역시키는 릭의 심리와 그가 마주치는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다룬다.

먼저 영화에서는 다뤄지지 않지만 소설에서는 중심 소재로서 다뤄지는 ‘동물’이라는 것이 있다. 만약 당신이 이 소설에 끌린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라는 독특한 제목 때문일 수도 있는데 아마 ‘전기양’이 뭘까?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그만큼 전기양 등 가짜동물과 염소 등 진짜동물의 구분은 이 소설에서 중요하다. 이와 관련된 설정이 소설을 흥미롭게 이끈다. 황폐화된 지구에선 다른 어느 것보다 어마어마한 가격의 ‘진짜 동물’을 키우는 것이 인간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부와 명예의 증거로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계로 만든 가짜 동물이라도 몰래 키우려 하며 이들을 수리하는 전기동물 수리센터도 나온다. 본래 목적이 아닌 사치로 동물들을 사는 이런 행태는 현대 사회의 부동산 투기를 생각나게 했다. 릭 또한 죽은 양을 대신해 ‘전기양’을 키우지만 이내 진짜 동물(염소)을 사기로 한다. 소설 내내 릭이 위험을 무릅쓰고 안드로이드들을 퇴역시키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전기양은 주인공의 목적이며,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소재인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엔 염소도 레이첼에 의해 죽고 릭이 가져온 두꺼비마저 구분되지 않았던 가짜동물이었다. 그가 그 고생과 혼란 끝에 이룬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두꺼비를 키우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제목에 담긴 의미를, 우리가 진짜 동물인 양을 생각하는 것만큼 ‘안드로이드들도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이는 공감과 감정이입이라는 소설의 또 다른 주제와도 이어져 있다.

이 두 소재에서 이 소설의 철학을 엿 볼 수 있다. 데커드와 안드로이드들 말고도 샌프란시스코에는 이지도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화성에 갈 수 없는 정신능력이 떨어지는 ‘특수인’이며 사람들에게 놀림과 무시를 받는다. 하지만 그의 무기는 기계한테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검사법이 공감능력을 체크하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는 매우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보는 안드로이드들과도 금방 친해지고 가짜 고양이의 신음에도 슬퍼하던 그. 하지만 데커드는 달랐다. 아내의 기분을 무시하고, 데이브를 경쟁자로만 생각하는 그가 무생물에게 공감할 리가 없다. 하루 빨리 가짜동물을 갈아치우기 위해 그는 안드로이드들을 어떤 자비도 없이 ‘퇴역’시킨다. 그러나 그도 레이첼이라는 안드로이드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생명체로서 인지한다. 같은 안드로이드인 프리스를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지도어는 프리스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쓸모있는 사람으로 인지시켰다. 그러나 결국 데커드는 프리스를 가차없이 죽이고, 울고있는 이지도어에게 다른 곳으로 가버리라 말하며 그와의 접점도 끊어버린다.

난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이지도어 같은 공감능력이 제일 필요하지만 데커드같은 이성적인 태도도 필요하다. 제일 중요한 건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감이고 뭐고 그저 안드로이드들을 퇴역시키는 무자비한 인간과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는 안드로이드는 구분이 가능한가? 하지만 비판과 이성 없이 공감과 감정에만 집착한다면 정보와 기계화의 세계 속에 우리는 파묻힐지도 모른다. 곧 다가올지도 모를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에 대비해야 할 우리의 자세이다. 소설은 단순히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대립에 관한 이야기만을 그리지 않는다. 사치를 위해 진짜 동물을 쫓는 사람들, 종교와 과학의 대립 등 다양한 사회 모습이 존재하는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결국 이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미래임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이 SF소설의 클래식 중 하나인 것도 그 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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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데미안 (양장) - 191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이순학 옮김 / 더스토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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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며 고민하고 방황한다. 그의 이분법적인 태도는 점점 더 그를 괴롭히며, 힘들게 만든다. '크로머'라는 아이를 통해 악의 세계를 접한 싱클레어는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때 그를 도와준 것이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구원자이며, 선생님이며, 또 유혹자였다. 데미안 은 그에게 모든 것을 선과 악,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려주며, 카인의 이야기의 다른 해석을 알려준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혼란에 빠진다. 카인을 악, 아벨은 선이라고 알아왔던 그에게 실로 큰 충격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혼합과 조화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도 양성자와 전자(음전자)로 이루어져있고, 우리의 마음도 선함과 악함으로 이루어져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기심도 있지만 이타성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둘의 합쳐짐으로써 형상화된다. 현실세계에서는 오직 하나의 성질만을 가지고 형상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선한 의도에서 한 행동은 나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 사람들이 악한 의도에서 한 행동이 좋은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 처럼 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그 안에는 악과 선 모두가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립관계 또는 싸움 등 악한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들은 이해관계에서 발생한다.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증오하고, 해치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선과 악이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추구해야할 '오직 선함'으로만 이루어진 ''을 상상했고, 배척해야하는 '오직 악함'으로만 이루어진 '악마'를 상상했다. 하지만, 절대선과 절대 악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 악과 선은 관점의 차이와 잘못된 이해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데미안은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다.

 

후에 싱클레어는 대학에서 방황하고 혼란을 겪는다. 심지어 그는 학교의 문제아가 되기까지 이른다. 그는 그를 구원해 줄 사람으로 데미안을 원하지만 데미안은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 때 싱클레어는 한 여성을 보고, 그녀에게 존경심과 사랑을 느낀다. 그는 그녀를 '베아트리체'라고 이름 짓는다. 그리고 그는 베아트리체를 그림으로 그린다. 그런데, 싱클레어는 그 그림 속에서 베아트리체 말고도, 데미안을 보고, 자신을 보고, 다른 여러 사람들을 본다. 사실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신곡'에서도 등장한다.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구원을 도와주는 인물이다. 물론 헤르만 헤세가 그것을 의도하고 썼을지는 모르겠지만 베아트리체는 구원과 사랑을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자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형상을 베아트리체, 즉 구원과 사랑 속에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받음을 통해 싱클레어는 타락한 자신을 회복하고 정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다시 만난다. 그리고 싱클레어에게 이런 쪽지를 보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이 구절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었던 것 같다. 가장 인상 깊고, 감동적인 구절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편견과 틀, 그리고 관점에 같혀서 산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이 본 것만을 맹신하고, 그것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그것을 깨라고 알려준다. 알을 깬 새는 하늘로 날아갈 것이다. 하늘은 비어있고 순수하다. 우리는 알을 깼을 때 선과 악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순수하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관점, 즉 자신만의 선과 악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락사스와 마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한 종파에 의해 숭배 받던, 후에는 악마로 전락한 신이다. 헌데, 아브락사스의 그리스어 문자를 모두 숫자로 바꿔 더하면 365가 된다. 이것은 365일을 관장하는 신들의 신이라고 해석된다. 데미안에서 아브락사스는 여러 가지 다양성의 융합과 궁극적 조화를 뜻하는 것 같다. 결국 그는 악이라는 것을 기피와 증오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그것과 당당히 마주하여 소통을 통해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고 포섭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데미안'을 읽은 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 글을 쓰면서 책을 다시 보았다. 고전문학은 칭찬받는 정말 이유가 있었다. 읽으면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새로운 의미와 교훈이 떠올랐다. 신화나 판타지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소설의 이름과 아브락사스, 베아트리체를 판타지의 상징적 관점에서 해석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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