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세기가 짊어지는 100년이라는 시간을 한 줄의 문장으로 압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세기가 20세기라면 그 어려움은 배가 된다. 20세기에는 인류의 역사를 영원히 바꾸어 놓은 큰 두 번의 전쟁과, 그에 뒤따른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사상가, 역사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20세기를 아주 짤막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요약한다. 그에 의하면 인류가 지나온 20세기는 '어두운 시대(dark times)' 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원제 Men in Dark Times)>는 이 '어두운 시대'를, 20세기를 살아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카를 야스퍼스, 이자크 디네센,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베냐민, 베르톨트 브레히트, 발데마르 구리안, 렌달 자렐, 마르틴 하이데거, 로베르트 길벗, 나탈리 사로트 그리고 위스턴 휴 오든까지 총 13여 명에 달하는 이들을 다룬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20세기의 사상, 사조, 역사를 변화시켰으며, 그들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한 명 한 명이 (서구) 사상사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이 '어두운 시대'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 반대로 그들이 20세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들이 이 책의 주된 탐구 방향이다. 


 한나 아렌트는 해당 인물이 남긴 저작물, 편지, 강의록, 연설 등은 물론이고 인간 관계, 개인적인 비화까지 수집해 나가며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20세기를 살아 나갔는지'에 주목한다. 물론 아렌트의 연구가 이 정도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그는 20세기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 사회 분위기, 국가간의 정치적 긴장, 각 인물들이 속해 있었던 공동체의 특성 등 다양한 맥락을 짚어 가며 인물의 삶을 되돌아 본다. 


"시대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시대와 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시대는 이들에게 그 특징을 아주 명료하게 각인시킨다. 프루스트, 카프카, 크라우스, 그리고 베냐민이 그런 사람들이다. (중략)사람들이 이상한 나라의 해안으로 표류하듯이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표류한 사람처럼 보였다."

본문 중에서  


 어떤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식물이 주변의 흙과 물을 빨아들여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자라나듯, 어떤 인물의 사상과 언행은 시대, 역사, 그리고 문화적인 배경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 면에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인물에 대한 연구서인 동시에, 20세기라는 광기의 시대에 대한 연구서이기도 하다. 인물의 삶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고, 시대는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는 통로가 된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으며 생각난 작품이 하나 있었다. 알란 베넷(Alan Bennett)의 희곡 <히스토리 보이즈(History Boys)>다. 이 연극은 1980년대 영국 고등학교의 '옥스브릿지(Oxbrige)' 대비반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옥스브릿지'가 영국의 유명 대학 옥스포드와 캠브릿지의 줄임말인 것을 생각해 보면, 연극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한국으로 치면 소위 'SKY' 대비반인 셈이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아이들에게 젊은 선생님 어윈은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한다.


Irwin : Why do we not care to acknowledge them? The Cattle, the body count. We still don't like to admit the war was even partly our fault because so many of our people died. A photograph on every mantelpiece. And all this mourning has veiled the truth. It's not so much lest we forget, as lest we remember. Because you should realize that so far as the Cenotaph and the Last Post and all that stuff is concerned, there's no better way of forgetting something than by commemorating it.

어윈 : 왜 우리는 이걸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 소 떼, 시체 더미. 우리는 전쟁이 일부는 우리 책임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지. 우리 국민이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이야. 집집마다 벽난로에는 죽은 가족의 사진이 하나쯤 놓여 있거든. 이 모든 애도가 진실을 가려 버린 거지. 이건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야. 기념비나 추모비가 세워지는 건, 무언가를 기념하는 것만큼 그것을 잊어버리는 데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란다. 그걸 알아야 해.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중에서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애도의 태도를 버리고, 심사위원들의 눈에 띌 만한 객관적이고 새로운 관점으로 20세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돌아보라는 것이 어윈의 주장이다. 어윈은 "요즘 시대에 역사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퍼포먼스고, 오락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고까지 이야기한다. 글쎄, 어쩌면 그의 말대로 대학의 심사 위원들은 똑같은 내용의 에세이를 몇 십 장, 몇 백 장을 읽느라 지쳐 있을지도 모른다. 애도의 시선을 걷어내고, 희생자와 사상자를 '사람 이전에 숫자'로 대하는 방식이 심사 위원들의 눈길을 끌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대학 입학 이후의 삶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진정한 역사를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숫자 이전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철저히, 집요할 정도로 '사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이 책이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20세기 역사와 사상의 흐름에 대해 평소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을 돕는 돋보기가 되어 줄 것이다. 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열 세 명의 인물들에 대해 궁금해하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참고서가 되어 주리라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번역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번역은 읽었을 때 걸리는 부분 없이 쏙쏙 이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곳곳에는 우리말에 잘 쓰이지 않는 수동태 문장이나 영어식 복문 등이 보인다. 번역의 의미는 외국어로 쓰여진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다. 따라서 번역에 있어 출발어(외국어)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도착어(한국어)다. 외국어 그 자체를 오류 없이 해석해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충실한 번역이 되지 못한다. 우리말에 쓰이지 않는 표현이나 어색한 문장 구조 탓에 책의 내용이 이해가 어려운 지점이 몇 있었다. 물론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서라도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의 20세기와 그 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연구를 소개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다음 책에서는 조금 더 명료한 번역을 통해 아렌트의 사상과 연구를 만나볼 수 있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다.

시대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시대와 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시대는 이들에게 그 특징을 아주 명료하게 각인시킨다. 프루스트, 카프카, 크라우스, 그리고 베냐민이 그런 사람들이다. (중략)사람들이 이상한 나라의 해안으로 표류하듯이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표류한 사람처럼 보였다. - P2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미술의 여정 - 사실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미술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만나는가
김현화 지음 / 한길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미술, 특히 회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물론 가끔 전시회에 기웃거리거나, 여행을 간 나라의 미술관을 둘러보기는 했지만 정말 그뿐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미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나에게 그림들은 그저 벽에 걸린 액자에 불과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미술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다소 엉뚱하게도 공연을 통해서였다.


연극 <레드>는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로 알려진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삶과 작품철학에서 영감을 받았다. 극중에는 괴짜 화가 로스코와 그의 젊은 조수 켄(ken)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삶과 죽음, 재현과 모방, 예술과 '예술의 아닌 것'의 경계, 그리고 현대 철학의 흐름 등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눈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레드>에는 캐릭터로서 무대에 서 있는 로스코를 포함해 수많은 화가와 미술 작품이 언급된다.


 로스코는 조수이자 제자인 켄에게 이렇게 성을 낸다.


 "하지만, 진지함이나 의미를 열망하지 않는 세대는 렘브란트나 터너, 미켈란젤로, 마티스, 그리고 나 로스코까지 포함해서 앞서 간 선배들, 분투하고 극복해 낸 사람들의 그림자마저 밟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야!"


 객석에 앉아 있던 나는 이 대사를 듣고 그야말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고전은 고전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이유가 있다. 지금에야 낯이 익고, 익숙하다 못해 식상해져 버리기까지 한 '고전'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마하바라타>가, <햄릿>이, <겐지 이야기>가 인류의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9년의 세상이 만들어지기까지 미술은 어떤 기여를 했을까? 어떻게 변해 왔을까? 누가 오늘날 '미술' 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만들었을까?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특히,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미술이고, 무엇이 미술이 아닌가? 서울 시내의 미술관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그림들과 조각상들이 미술이라면, 누가 이것들을 '미술'로 만드는가? 어떻게 오늘날의 미술은 이런 모습에 이르게 되었을까? 누구나 한 번씩은 떠올려 보았을 만한 질문들이지만, 동시에 누구도 섣불리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평생을 궁리해야 할 만한 이 질문들에 길라잡이가 되어 줄 만한 책이 있다면 바로 <현대미술의 여정>일 것이다.


 <현대미술의 여정>은 그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미술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모습이 되기까지의 200여 년의 발자취를 이야기한다. 사실 리얼리즘부터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미술까지를 책 한 권 안에 담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리얼리즘 시기의 회화'라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대학의 한 학기 강의 시간을 꽉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의 여정>은 작품 하나, 작가 개개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미술 사조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다. 당대의 역사, 정치적 상황, 예술가들 사이에서 오가던 담론 등을 배경으로서 짚어 준 다음, 왜 이런 시기에 이런 흐름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으며, 어떤 작가나 작품의 등장이 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맥락 속에서 이야기하는 식이다. 지금껏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등 달달 외우기만 했던 딱딱한 사조들이 일종의 사상적 엔진으로서 그 시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정말이지 즐거운 경험이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의 대부분이 서구 미술사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굉장히 최근까지 '무엇이 예술인가'를 결정하는 문화 권력 자체가 서구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모던 이전까지의 미술은 지식 및 권력 체계가 '이것이 예술이다' 라고 정의한 것에 가까웠다. 미술이 혼성, 다원성을 기반으로 소수자의 목소리 등 그 동안 소외되어 왔던 것에 귀기울이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현대미술의 여정>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여기까지의 발걸음을 더듬어 왔다면, 지금부터 일어날 변화를 담아내는 것은 아마 또 다른 일이 될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담아낸 다채로운 풍경과 로스코의 단색 캔버스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보이지만, 마네의 <풀밭 위 식사>가 없었더라면 피카소도, 로스코도, 앤디 워홀도 없었을 터이다. 바위 틈새로부터 흐르는 물줄기 없이 커다란 강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미술은, 그리고 역사는 그렇게 흐르고 또 '여행'한다. 우리가 지금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작품들도 아마 이 거대한 흐름에 보태는 하나의 물방울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말레비치는 이 땅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인간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오브제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인데도 학벌, 지위, 돈, 권력 등으로 그 가치가 가려진다. (중략) 만일 인간의 존재 가치를 뒤덮고 있는 오브제가 사라진다면 인간 존재만이 가치를 드러내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이 부재하는 세계는 인간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부재는 강한 존재의 확신이다. - P3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산책할까요 - 내 인생에 들어온 네 마리 강아지
임정아 지음, 낭소(이은혜) 그림 / 한길사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어릴 적 내 꿈 중 하나는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이었다. 당시의 일기를 보면 '강아지든 고양이든 햄스터든 좋으니 친구를 데려다 주세요.' 하며 성탄절마다 간절한 소원을 빈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린 동생이 천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동물을 기르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결국 등하굣길마다 마주치는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보며 부러운 눈빛을 던지거나, 동물을 키우는 친구의 집에 놀러가 몇 시간이고 넋 놓고 지켜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얼마나 귀여운지, 얼마나 씩씩한지, 얼마나 똑똑한지……. 그런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어린 나는 동물을 길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기대와 감상에 부풀어 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잠깐 보아 귀엽고, 영리하고, 예쁜 것은 모든 동물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같이 산다면, 살을 부대끼며 지내는 '가족'이 된다면 어떨까? 그때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할까? 임정아 작가의 <우리 산책할까요>는 바로 이렇게 '가족처럼 부대끼며 사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우리 산책할까요>는 어려운 책은 아니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글로 담아낸 것이 에세이인 만큼, 일상적인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또 어떻게 보면 그만큼 '쉽게 읽히는 글'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그 무게가 가볍지는 않다. 작가는 네 마리의 개와 얽힌 순간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풍경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을 찬찬히 짚어 나가는 작가의 담담한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가슴이 뭉클해진다. 즐거웠던 시간들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의 너무 이른 이별이라는 슬픈 사건을 마주해 함께 겪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이게 가족이 아니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가 본문에서도 이야기했듯, 어쩌면 반려동물과의 삶은 '슬픈 동행'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동물의 수명은 사람보다 길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끝이 있다는 점에서 이 만남은 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끝없는 상처와 고통의 연속인데도 인생은 왜 아름다운 것인지" 그 비밀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삶은 아프고도 아름다운" 것이니까! 삶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보는 임정아 작가의 시선은 참 다정한 온도를 갖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픔과 상실감이 큰 만큼 새롭게 깨우친 사랑의 깊이 또한 크고 깊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비밀인 것 같다. 끝없는 상처와 고통의 연속인데도 인생은 왜 아름다운 것인지를 푸는 비밀의 열쇠, 무심한 바람결에 어디선가 휙 스쳐오는 꽃향기 같은 것. 그래서 삶은 아프고도 아름답다. - P1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시아 건축기행 - 유토피아를 디자인하다 My Little Library 7
강영환 지음 / 한길사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여행을 하는 것만큼이나 여행기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기에는 작가의 삶의 궤적이 묻어난다.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을 돌아보고 오더라도, 여행을 떠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도시의 모습은 달라진다. 여행기에는 그 사람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대하는 시선이 그대로 담겨 있다. 천 명의 여행자가 있으면 천 명의 시선이, 또 천 개의 풍경과 천 개의 이야기가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 건축기행>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여행기다. 이 책에는 건축과, 건물에 얽힌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오랜 사랑이 묻어난다. <아시아 건축기행>은 저자가 지난 사십여 년간 발로 뛰며 보고 느낀 점을 적은 견문록인 동시에, 그가 스쳐지난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 '사람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미얀마, 타이, 라오스, 네팔, 부탄....... 저자가 돌아보고 온 10여개국은 우리에게 익숙한 나라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먼 이름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웃한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보다는 바다 건너, 혹은 다른 대륙에 위치한 서구 국가들의 역사에 더 익숙해져 있다. 지금까지의 세계사가 철저히 서구 사학자들의 입장에서 연구되었던 탓이다. 70년대 이후 '제 1세계' 바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주목하는 바람이 불어 조금씩 판도가 바뀌고는 있다고 하지만, 기존에 축적된 서구중심주의적인 시선을 걷어내기는 쉽지 않다.


저자 강영환 교수는 건축, 그 중에서도 건축에 얽힌 역사를 공부해 온 사람이다. <아시아 건축 기행>이 여행기이자 역사서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 곳곳의 건축물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저자는 건물의 아름다움과 기교, 건축 기법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변 풍경도 놓치지 않는다. 건물 주변을 둘러싼 '오늘의 풍경',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타지마할 같은 환상의 걸작이 지닌 아름다움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슬럼가의 아수라장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그것은 건축유산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과연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멋진 건축물인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누구에게 멋진 건축인가를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건물을 지었거나, 그 건물에 살았거나, 그곳에 기도를 하러 왔거나, 그 곳을 지켜내거나 혹은 얻기 위해 피흘리며 싸웠거나, 혹은 만들어진 지 수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같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주목하기보다는 건물을 통해 거기에 엮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참 따뜻했다. 작가의 말마따나 거대한 건축물들을 보며 그것을 지었을 이들의 땀과 고통, 삶의 단면을 기억하는 것이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피라미드 앞에서 거대하고 경이로운 건축기술을 찬탄하지만, 그것을 짓는 데 동원된 히브리 노예들의 땀과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탁월한 예술적 조형으로 칭송받는 유럽의 중세 성당 같은 걸작품을 보면서 종교세로 착취당하던 민초들의 고통을 떠올리는 사람도 드물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읽다 보니, 예술가의 삶을 다룬 또 다른 책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바로 오스트리아 작가인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몰락하는 자(Der Untergeher)’이다. ‘몰락하는 자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친구였던 서술자 ’, 그리고 베르트하이머가 이상적 예술 앞에서 몰락해 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장편 소설이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와 베르트하이머는 모두 피아노 연주를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어느 날 글렌 굴드라는 천재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재능과 자신감이 넘치는 천재 글렌의 옆에서 두 인물이 힘들어하는 부분의 묘사가 굉장히 깊은 인상을 준다.

 

피아노 대가의 길, 아니 음악을 통틀어 봤을 때도 베르트하이머와 나를 죽인 사람은 호로비츠가 아니라 글렌이었어,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와 내가 피아노 대가가 될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때 이미 글렌은 피아노 대가로 가는 우리의 길을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호로비츠 수업이 끝나고 몇 년간은 우리가 대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지냈지만 사실 글렌을 만난 순간 이미 그 가능성은 물거품이 되었던 것이다.’

 

깊이에의 강요에는 몰락하는 자에서의 글렌 굴드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깊이 있는 예술', 즉 이상적인 예술에 대해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깊이에의 강요가 독자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 중 하나인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라는 질문에 몰락하는 자는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저 나 자신이기를 바랐던 반면 베르트하이머는 평생 계속되는 절망에 이를 정도로 다른 사람이기를, 즉 자기가 봤을 때 삶이 순탄하고 잘 풀리는 사람이기를 원했어. (중략) 절망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여기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베르트하이머는 그럴 줄 몰랐던 거야, 난 생각했다. (중략)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나는 생각했다.’

 

서술자인 는 베르트하이머가 질투와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해버린 것이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보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깊이에의 강요에서 젊은 예술가가 자살을 택한 것도 자신의 예술에서 남들이 이야기하곤 하는 깊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평론가와 대중을 포함한 모든 타인들이 강요하곤 하는 깊이 있는 예술은 결국 타인이 이야기하는 것, 타인의 욕망에 대한 모방에 불과하다.

 

예술가 스스로가 하고 싶어서 하는모든 예술은 자신의 욕망과 세계관에 기초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타인의 욕망, 타인의 세계관과 예술가의 욕망이 비슷한 방향을 띠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특정한 예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저 그 예술 작품에 담긴 예술가의 방향성이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의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일례로 가장 유명한 화가들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빈센트 반 고호의 작품이 생전에는 냉대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타인이 말하는 깊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하며 또 쉽게 바뀌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러한 깊이의 문제는 예술과 평론의 문제를 벗어나 나-타인과의 관계로도 확대 가능하다. 인간이 사회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이상 우리의 언행은 타인에게 노출되어 그들의 평가를 받게 된다. 필연적으로 타인의 평가에 둘러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으려면, 곧 남들의 시선과 평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태도는 이 타인이 말하는 깊이나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