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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한국인의 영어 소설 ? 서사의 힘
이 책을 쓴 이미리내 작가는 20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쭉 살았던 한국인이다.
성인이 된 후에야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고
남편의 직장이 홍콩으로 발령받게 되어
영어가 공식 언어인 현지 대학원에서 영어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쓴 영어 소설이 미국의 대형 출판 그룹에게
억대 제안을 받고 그 후에도 여러나라 출판사들과의 계약이 이루어진 이유는이 소설이 가진 서사의 힘,
그 서사는 한국이 가지고 있던 아픈 역사를 근거로 했기 때문에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따라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모든이들이 공감할만한 소설이 된 것이다.
어렵게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소설은 그냥 재밌다.
일단 재밌기 때문에 다른 기타 이유를 붙이지 않고서라도
적극 추천할 수 밖에 없다.
묵미란, 용말, 간요,데버라
이름 없는 여자의 이름들
황혼 요양원에서 부고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나"는
깨진 앞니를 가지고 흙을 즐겨먹는 묵할머니를 만난다.
지금은 묵미란이면서 과거에는 용말이기도 했고, 간요이기도 했으며 데버라로도 살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진짜 본명은 무엇인지 나오지 않는다.
이름 없이 여러 이름으로 살았던 묵 할머니.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북한 사람으로 살았고
남한 사람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묵 할머니.
노예, 탈출 전문간,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로 살아냈던 본인의 인생을 담담히 기술한다.
묵할머니의 인생이 한 편의 단편 소설집을 여러개 묶은 형식처럼 다섯 번째 인생, 첫 번째 인생, 세 번째 인생 ... 등으로 펼쳐지는데 각각의 에피소드가 시간 순서로 나열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소설의 중 후반부로 가면서 앞의 이야기의 의미를 깨닫게 되며 동시에, 뒤에서 펼쳐질 이야기들이 기대되기 때문에 한 편 한 편 집중 해서 읽게 된다.
결국 이 책은 묵 할머니가 살아낸 험난한 인생을 기록한 것이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누구보다 현명했던 어머니 밑에서 흙을 먹는 요망한 버릇을 가지고 있던 묵 할머니였지만
섬세한 어머니는 딸을 유별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별난 딸의 똑똑함으로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울 수 있게 하고 약초와 독초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배웠던 지식으로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살아남았고
태평양 전쟁시절 일본군에게 위안을 강탈당하면서도
살아내고 살아남아 용말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다시 이 용말의 이름으로
한국 전쟁시절 미군에게 위안을 강탈 당하던 제니이자 송재순을 구하고 위안을 강매한 몽키하우스를 불태워버리게 된다.
우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위안의 의미를 배웠다.
97p
너무나도 가슴 아픈 역사다.
그 아픈 역사를 살아내었던 여성의 삶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일본군에서 다시 미군으로부터 위안을 강탈당해야만 했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위안을 배워야만 했던 여성들.
하지만 이 책은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닌
독살을 하고, 저항하며 도망치고,
하우스 전체를 불태우며 외치는
능동적인 여성상이 그려져서 좋았다.
얘들아, 불태워버려라, 다 태워버려
105p
용말의 이름으로 북한에서 영민과 결혼을 하고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미희"라는 이름으로 키운다.
본인과 똑같이 유별난 미희의 재능을 제한시키기보다는
감추면서, 들키지 않는 방식으로 키워준다.
그 결과 미희는 북한의 공작원이 되어
성미라는 이름으로 남편 에이드리언을 만나게 된다.
묵할머니와 그 딸 미희는 평행이론 처럼
닮은 인생을 살게 되는 것 처럼 보였지만
묵 할머니의 노력으로,
성미가 아닌 미희로 다시 살 수 있게 된다.
묵 할머니의 한 편 한 편의 인생을 읽다보면
그 과정이 너무 처절해서
한번에 다 읽어낼 수 가 없었다.
묵 할머니의 어머니는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의 폭력앞에 저항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딸은
데버라로, 간요로, 용말로 마지막은 묵미란으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한 시대를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살아남았다.
살아내고 살아남았던 방식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냥 아름다웠다라고만 말하고 싶다.
이 책은 마지막은
어릴적 어머니에게 배웠던, 아버지를 해결했던
사낙으로 묵 할머니의 인생이 마무리 된다.
고된 인생의 시작점이었던 사낙이
고된 인생을 끝내기도 했던 것이다.
입 안에 흙을 머금고 있던 묵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계속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