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쓸모 - 그리움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신동호 지음 / 책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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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들어가 서서히 

그 사람의 자리에 앉아 보는 일이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도 그렇다. 

그것은 천천히, 그 사람의 호흡을 따라 들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앉아 보는 일이다.

진솔한 속내가 오롯이 담긴 그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 놓은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올해로 서른다섯이다. 

내 삶의 타임라인은 신동호 시인이 살았던 시기와 상당히 겹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크게 겹쳐지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같은 시대를 살더라도 공간이 달랐고, 살아가는 나이가 달랐기 때문일까.

세월을 따라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가 추억하고 있는 시간이 내 지식의 저편에 있는 것인 까닭일까.

아니, 그 이질감은 무엇보다 그의 글이 지닌 감촉에서 비롯된 것 같다.

고르고 골라 직조한 글의 감촉이 와 닿는 느낌에 대한 이질감.

문장 하나 하나를 귀기울여 읽지 않는 버릇에 대해 문제 제기라도 하듯 

느릿느릿 말 걸어오는 텍스트는

내가 만지기에 너무 값비싼 직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바람의 촉각을 통해 존재자로서의 자신을 느꼈던 듯하다. 작은 백부는 기기공업사를 했다. 주로 군인들의 오토바이를 수리했다. 백부의 등에 묻혀 털털거리는 오토바이의 진동을 엉덩이로 전달받았다. 백부와 나와 오토바이의 일체감 속에서 오히려 나를 느꼈다. 가가린은 지구 바깥에서 '나'를 보았을까. 아니다. 피부에 닿는 모든 것이 '나'를 자각하게 한다. 사랑도 그렇다. 몸을 섞고 있을 때 내가 더 잘 보인다. (20쪽)

가끔은 마음의 불을 끄고 싶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등화관제가 필요할지 모른다. 자신에게서 뿜어져나가는 모든 것(말과 눈빛과 손짓 모두)을 차단하고 고요에 빠져볼 일이다. 나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들려올지 모른다. 별빛 한 점, 새어들지 모른다. (49쪽)


책의 제목이 <세월의 쓸모>다. 

'세월'이라는 말로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생을 살아가면서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생사화복과 고락을 담을 수도 있고, 어느 한 시대의 조각을 지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 <세월의 쓸모>에는 전자로서의 세월과 후자로서의 세월이 거의 늘 동시적으로 등장한다.


오래된 사진들이 세월의 쓸모에 대한 이야기를 거든다. 지금은 사라진 음료인 <삼강사와>의 광고. 아마도 신문지면에 실렸던 이미지인 것 같다. 그 왼쪽에 소박하게 정겨운 <목욕합니다> 입간판. 

그리고 거기,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 그가 아버지가 된 이야기.


몸이 으스스하도록 겨울바람이 불면 김이 뽀얗게 서린 동네 목욕탕이 생각난다. 살이 벌게지도록 때를 밀어주시던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수건을 접어서 이태리타월에 집어넣는 방법을, 나는 지금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명절 앞이면 아들을 데리고 되도록이면 작은 목욕탕을 찾는다. 온탕에 몸을 담그면 아랫도리부터 뜨끈뜨끈하게 아버지 생각이 올라온다. 그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바나나우유를 권한다. (아버지는 삼강사와를 사주셨다. 왜 삼각사와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걸 마시는 재미로 온탕의 고통을 참았을 것이다.)


옷을 벗는 일은 간혹 세월을 확인하는 일이다. 벗은 몸뚱아리를 보는 일은 매번 세월을 확인하는 일이다. 구석구석 때를 밀다가 사타구니에 자란 흰털을 발견하는 일은 세월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이다. 발뒤꿈치나 팔꿈치를 사랑하게 되려면 때를 밀어보아야 한다. 아들의 등을 밀어주다가 문득 "어깨가 믿음직하다"고 느껴보려거든 사우나 말고 동네 목욕탕의 키 낮은 의자에 앉아보아야 한다. (52쪽)


그의 세월의 쓸모가 전해온다.

더불어 

내가 살아온 세월의 쓸모도, 내가 살아갈 세월의 쓸모도 느껴본다.


여백이 꽤 많은 책이다. 문장도 쉽게 잘 썼다. 

그래서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천천히 읽을 것을 권한다.

혹은 다시 읽을 것을 권한다. 

아니, 이런 권장이 아니고서라도 어쩌면 

절로 읽는 속도가 느려질지도 모르는 책이다.

행간의 여백마다 생각할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흡을 아주 서서히 늦춰 시인과 나란히 걷는 듯이 읽게 되면

문득문득 궁금했던 어떤 세월들에 대해 발견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잊어버렸던 세월들에 대해 떠올리게 되기도 할 것이다.


만일 십년쯤 뒤에 다시 이 책을 집어들어 읽게 된다면 

어쩌면 나는 왈칵 눈물을 쏟을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물질적으로는 가벼우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충분히 진솔하지만 질척거리지 않고, 충분히 먹먹하지만 흐릿하지는 않다.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진다. 

<세월의 쓸모>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돌아서 가다가 다시 뒤돌아보라. 가슴이 먹먹한 건 거기 마음을 두고 왔기 때문이다. 마음이 답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시간이 어른이 되어 가는 시간이다. 물론 그리움의 흔적은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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