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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본문이 고작 280쪽에 불과한 김훈의 신작 하얼빈을 읽었다. 이 소설은 이등박문이 명치 일왕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망원경에 제 눈을 들이대고 안중근, 이등박문, 우덕순, 김아려, 빌렘신부, 뮈텔주교 등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원거리에서 들여다본다. 작가는 결코 안중근의 행위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여 치열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소설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행위에 민족사적 의미와 주제를 찾는 건 무의미하다.
분명 맛있지만 영양은 전혀 음식을 먹는 것 같다, 이게 그동안 김훈의 소설들을 읽은 나의 일관적인 독후감이다. 김훈은 소설을 쓸 때 1인칭 주인공 시점이든 전지적 작가 시점이든, 캐릭터 속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빙의하지만 캐릭터의 내면에서 아무것도 건져올리진 않는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쓴 <칼의 노래>,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중심에 두고 항전과 항복을 다투는 대신 간의 갈등을 다룬 <남한산성>이 그러한데 <하얼빈>에서도 반복된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든, 상황을 중심으로 에피소드를 구축하든 이야기에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 때문에 글을 짓는다. 김훈의 소설에는 그게 없다. 작의도 없고 주제도 없다. 그저 비장한 언어와 허무에 빠진 문체 뿐이다. 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얼마나 빈곤했으면 15000쪽이 넘는 안중근 공식 자료집을 참고하고 쓴 결과물이 고작 280페이지에 불과하다. 도대체 읽을 게 없다.
극우적 정치성향에 남근중심주의자인 소설가 이문열은 내가 혐오하는 작가다. 그러나 이문열이 소설을 지을 때 주제의식과 상상력 만큼은 풍요롭게 전개한다는 걸 나는 인정한다. 이문열이 안중근 의사의 삶을 다룬 소설 <불멸>을 읽어보라. 800쪽에 이르는 서사에서 독자는 불모의 역사 속에서 안중근 의사가 고민한 행로를 공유하게 된다. 소설이란 바로 그런 거다. 김훈은 소설가가 아니다. 그저'갬성'적 문장을 잘 쓰는 수필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