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5716쪽에 달하는 민음사 번역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오늘 새벽에 완독했다. 독서 시작일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완독까지 반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스토리에 서사만 있고 플롯이 없는, 오직 화자의 의식에 포획된 인물과 사물 묘사에만 집중하는 이런 형태의 소설은 결코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알랭 드 보통이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에서 표현했듯이 “죽음의 임박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삶에 대한 의욕을 느끼”면서 독신으로 50대의 삶을 통과하는 내 인생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그 모든 인물들이 화자의 관념 속에서 재평가되어 소설 곳곳에 편재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화자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화자가 보았던 인간과 사물이 시간 속에 유입되어 소멸하는 과정을 작가는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얘기하는 인간으로 또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고, 다른 인간 전날의 창조물, 그가 현재 가진 습관들의 요약에 지나지 않은 인간으로 만드는 (비록 그의 마음속에는 그를 과거에 연결해 주는 삶의 연속이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런 오류 또한 ‘시간’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것은 시간의 현상이 아닌 기억의 현상이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제13권 192쪽
시간이 존재한다고 믿고 인생의 의미를 그 시간 속에 박제하려는 시도는 시시포스의 바윗돌과 같다. 인간은 70프로가 물로 구성된 육신에 갇힌 의식의 벡터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현상에 불과하다. 의식의 벡터가 멈출 때 인간의 삶도 소멸한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어떤 가치를 획득하고 그것을 세계에 박제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자신의 눈에 포착된 풍경을 기억했다가 시간이 지난 후 응축된 그것을 말로 풀어내거나 종이에 적을 수 있을 뿐인데, 이것은 진실과는 무관하다. 어차피 기억이란 사실의 화석이 아니라 편집된 의식의 편린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았던 장소들은 단지 우리가 편의상 배치한 공간의 세계에서만 속하지 않는다. 그 장소들은 당시 우리 삶을 이루었던 여러 인접한 인상들 가운데 가느다란 한 편린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이미지에 추억은 어느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일 뿐이다. 아!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제2권 407쪽
이 작품을 읽었던 지난 반년의 시간은 지난했다. 그러나 고단함을 극복하면서 이 작품을 읽어갈수록 나는 부정의 늪에 가라앉은 내 삶과 오늘 내가 보낼 시간들에 조금은 긍정적인 감정을 껴안을 수 있었다.
그와는 다른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지만 고단한 내 인생의 여정 속에서 이 작품을 읽게 해 준 작가 마흐셀 프후스트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