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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카뮈가 쓴 <레뜨항제>의 화자(‘나’)는 자궁과 무덤 사이에 선 위태로운 다자인(Dasein)이다.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근거를 확정하지 못하는 ‘나(뫼르소)’는 당연히 왜 사는지도 모른다. 그냥 거기에 이유 없이 던져진(피투) 인생이기에 목적 없이 자신을 미래로 던져가면서(기투)하면서 세계 속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생의 기원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각개의 인생이기에 때로 ‘나’는 세계 속의 타자가 의미한대로 날조된다.
하나의 사건은 이어 벌어진 사태에 원인이 되고 다음 사건에 목적이 된다고 믿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 엄마가 죽었고 피곤한 ‘나’는 엄마의 시신을 안치한 관 앞에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때로 졸기도 한다. 사회 질서가 부여한 인위적 도덕 관념을 제거하면 열거한 사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후 ‘나’가 누군가를 살해하고 법정에 서면 내가 마시고 피운 카페오레와 담배와 때때로 졸았던 행위는 ‘나’를 험하게 추궁하는 무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작품에서 공판검사는 '나'를 가리켜 “범죄자의 마음가짐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기소하는 바입니다(본 책 104쪽).”하고 말한다. 분명 '나'는 엄마의 장례 이후에 벌어진 아랍인 살해로 기소되었는데 검사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검사의 진술은 모순이다. 검사는 시간을 소급하여 사건의 인과관계를 역전하였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과 아랍인 살해는 시간상 순차적으로 발생한 별개의 사건이나 두 사건은 특정한 시간 속에 ‘나’라는 육신이 담겨 있고 거기에 특정한 질료(까페오레, 흡연, 코미디 영화관람, 연인과 섹스)를 덧붙임으로서 검사는 ‘나’에게 묻는 유책성의 근거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지옥(사르트르의 '타자')이 확립한 질서를 준거로 과거에 ‘나’가 행한 각개의 사태를 재단하고 죄를 붙인 것이다. 이렇게 세계 속에 머물고 있는 '나'는 지옥들이 합의한 질서에 갇힌다. 만약 그 질서를 불응하거나 위배하면 개인은 타자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즉자존재(의식없는 사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카뮈 작품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이휘영 선생과 카뮈 연구에 일생을 보낸 김화영 선생은 <레뜨항제L'Etranger>의 캐릭터이자 내레이터인 '나(뫼르소)'를 세계 내에서 이유없이 겉도는 인간으로 보았다. 반면 최근에 번역한 이기언 씨는 '나'를 동일자(le meme) 앞에선 '타자(l'autre)'로 본 것 같다. 말하자면 푸코가 말한 '나에게서 배제된 나'의 존재다.
카뮈의 전작을 읽은 문학애호가로서 의견을 덧붙이면 나는 이휘영 선생과 김화영 선생이 번역한 제목에 이의가 없는 것처럼 이기언 씨가 붙인 제목에도 긍정한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거울 앞에 섰을 때를 가정해보자고 말하겠다.
우리는 거울 앞에서 선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동일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악수할 목적으로 손을 내밀면 그 즉시 신뢰는 깨진다. 당신이 거울 앞에서 오른 손을 내밀면 거울 속의 당신은 틀림없이 왼쪽 손을 내밀 것이다. 악수가 친밀함과 화해를 상징한다면 거울 앞에서 선 나와 거울 속의 나는 감정적으로 절대 섞일 수 없는 나의 반의식(프로이트의 무의식)이다. 바로 이기언 씨가 붙인 제목대로 이인이 되는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나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닌 그 누군가. 대관절 이 부조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걸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차분하게 본 뒤에 역자의 해설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