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에게, 글자 풍경

글자 풍경 - 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유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이 발간되기 전, 스터디를 위해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글들을 찾아보다가 유지원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타이포그래피와 글자체에 대한 여러 글들을 읽게 되었고 단지 도구라고 생각했던 글자체들 간의 흐름과 그 쓰임이 그 자체로 생생한 소통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 소통이라는 목적아래 여러 목소리들이 오간다. 발표를 위해 잘 정돈되고 쉬어감이 있는 목소리나 고발 혹은 연대를 위해 진중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 타임 세일을 위해 마트 여기저기서 쇼핑 카트 핸들을 돌려 세우는 굵거나 재빠른 목소리들. 또는 애정 어린 마음을 담는 속삭임과 같은 조용한 목소리들도 있다. 이는 소통의 ‘소리’ 이면서 동시에 일상 속 글자체의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글자체의 쓰임 속에서 우리는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때론 불편함을 찾아가며) 여러 소통을 이루어나간다. 무의식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잘 정돈된 타이포그래피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잘 디자인된 글자체란 무엇일까?

  좋은 글자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주어진 글자체가 어떤 목소리를 내왔으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웹과 책을 통해 한글 글자체의 흐름과 종류에 대해 자료를 모아 스터디에서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흥미로운 자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다양한 옛 궁체들의 종류와 차이점등...) 학부생 입장에서는 분류의 ‘기준’을 세우기가 애매했다. 현대와 이어져있는 글꼴 같아 보이면 자료에 넣거나 아는 매체 내에서 글꼴들을 비교하거나..훈민정음과 같이 비교적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돈된 내용들도 ‘스터디 자료’로 공유해서 만들자니 금방 지치곤 했다. 그러던 와중 sns를 통해 글자 풍경이 나온다는 소식에 서평단을 신청하게 되었다.

  1장은 유럽과 아시아의 글자풍경을 다룬다. 초반에 나오는 소제목 중 ‘글자는 지역적 생태성을 지닌다.’ 부분을 읽으며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옛 간판들이 생각이 났다. 녹이 슬고 굵직한 글자들은 가게의 세월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당시 분위기를 나타내준다. 깨끗한 거리, 가게를 위해 간판들이 새롭게 설치되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럴 때 마다 가게만의 작은 역사가 담긴 글자가 너무 쉽게 지워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느 칼럼에서 촌스러운 건 촌스러운 것 자체로 잘 디자인 된 것이라는 글을 읽었었다. (촌스러움의 기준이 너무 모호했지만) 촌스러움, 복고의 유행이 돌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익숙한 반가움이 있다. 깔끔하지 않아도 옛날부터 봐오던 것들을 살펴보고 좋아하는 일에는 큰 힘이 들지 않는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공감과 기억을 기반으로 한 교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이런 연결고리를 살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글자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외에도 지역별 여러 글자체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담겨있다. 룬문자나 에스체트와 같이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글자들의 이야기들이나 거리를 지나가면서 종종 접했던 서울 서체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홍콩과 인도의 사례에서 타이포그래피의 다양성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책을 읽기 전 세로쓰기에 대해 공부해보면서 띄어쓰기나 문장부호처럼 당연시 여겼던 부분들이 로마자 타이포그래피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글의 과거 사용법이나 그 외에 다양한 타이포그래피의 방식들이 궁금했었다. 홍콩의 사례에서 로마자와 한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공존하는 것을 보고 한글로 쓸 수 있는 부분을 구태여 영자로 쓰는 사례들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이미 로마자방식을 충분히 따라 타이포그래피를 하고 있는데, 표기까지 영자로 한다면 대상과 환경을 고려했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또한 물성이라는 공존의 방법으로 이질성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과 인도의 로컬 타이포그래피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대학에서의 타이포그래피수업은 다양성보다는 한 학기 내에 기초를 다지는 것에 목적이 있다. 깔끔한 타이포그래피는 완성도가 높고 가독성이 좋다고 배우곤 하지만 가끔 대상과 문화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기계의 영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적어도 문화와 대상을 이해한 뒤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것이 타이포그래피임을 수업에서 느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장은 한글 글자체에 관한 장이다. 궁체와 명조체의 흐름, 현대의 글자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최정호 디자이너는 궁체 중 정체의 필법을 바탕으로 명조체를 설계했다고 한다. 속공간이 궁체보다 크게 되어 있어 인쇄용으로 적합하다. 그 중 한글 신문명조체는 사각형의 글자 공간을 더 곽 채우는 골격과 가는 획을 가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명조보다는 고딕에 가깝다고 적혀있는데 기존에 봤던 신문들의 글자체들의 유난히 커 보이는 느낌이 여기서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최정호 디자이너의 원도가 번짐 현상까지 고려해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동시에 명조들의 특성들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명조체는 붓으로만 된 서체를 의미할 줄 알았는데 펜과 같이 필기구를 현대화하여 시대에 맞게 확장되는 생생함이 있었다. 가장 친숙했던 글자체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었다.

  3장에서는 글자체들의 다양한 활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표지판이나 시스템에 사용되는 글자들의 이야기들 중 한길체는 산돌고딕체에 비해 탈 네모꼴 형식으로 눈의 판독성을 향상시켰다고 한다. 평소 긴 단어의 경우 한길체인지 산돌고딕체인지 잡아다가 줄여놓은 표지판 글자들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인지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떠올라 긴 단어인 경우 글자체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서예와 타이포그래피의 부분에서 글씨 쓰기의 물리학 이야기도 나온다. 펜의 움직이는 속도와 종이와 펜과 잉크 사이에 물리화학적인 작용들이 글자의 모양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글자 형태의 강약을 생각하면 서양의 필기체나 궁서체의 붓 느낌만이 떠오른다. 하지만 종이의 성질과 속도의 여러 변주를 통해 더욱 넓은 범위에서 글자가 디자인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글쓰기라는 행위가 많은 변수들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렸다.

  4장! 서평단 메일을 받으면서 추천받은 4장이다. ‘악보 위에 피어난 꽃’ 부분에서 작곡가들의 ‘들리지 않는’여백들이 꼭 전화 통화 할 때 여백을 가득 채우던 낙서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피날레 장식들이 눈만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적혀있다. 타이포그래피의 전문 용어로 장식용 인쇄 활자는 ‘플러런’, 즉 꽃이라고 한다. 예전 책들의 자료를 보면서 이 장식들이 재미있어서 몇 가지를 살펴보곤 했기에 음악가 관점에서 그려진 것들이 흥미로웠다. 물론 실습을 하다보면 장식은 거의 넣는 일이 없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장식을 부탁받았을 때 어떻게 넣어야 ‘안정적’인지 고민하느라 넣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바흐의 그림은 작곡가의 배려도 담겨 있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글 사이에서 공백 이외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 같다. 과하면 독이겠지만 가끔 대놓고 아름다움으로 출마했습니다. 하면 조그만 교감으로 읽는 이에게 다가갈 수도 있지 않을까.

  글과 그림은 그 자리에 부재하는 것들의 흔적으로 남은 것이라 한다. 사진은 간혹 순간을 얼린 것이라고도 표현하던데 글과 그림 역시 멈추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부재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생긴 것이라 적혀있다. 모든 것들은 살아 있지만 동시에 전해지지 않으면 살아있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소통과 이해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 생명력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여러 방법으로 기록을 한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사람의 마음에 닿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뜻을 전한다는 일은 더더욱. 타이포그래피와 인쇄술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해준다. 좋은 뜻이 널리 퍼지도록, 그리움을 넘어 소통의 장에 머물 수 있도록 언제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음을 이제는 더더욱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완독을 끝냈다. 말 그대로 얼굴만 아는 폰트들의 이야기들이 생소할수록 흥미로워서 관심이 가는 장에서는 추가로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인상 깊은 곳을 표시했더니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게 되었다. 모든 장이 즐거웠지만 개인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는 주제들로 간단하게 장 별로 정리해보았다. 눈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속내까지는 찾아볼 생각을 못했던 글자들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일상 속 글자들마저 새롭게 보였다. 단순히 좋은 글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서 글자를 쓰고 새기는 일, 도구의 이야기, 문화의 이야기까지 하나의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책 제목 그대로 ‘글자 풍경’을 즐겁게 보고 온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