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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인간 ㅣ 김동식 소설집 1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평점 :
김동식 소설집을 처음에는 3권만 샀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재미있게 읽었어도 책의 만족도는 다르겠거니 하고 시험삼아 한 권만 산 것이다. 결국엔 3권에 감화받아 1,2권도 주문했고, 나도 김동식 전집의 독자 반열에 들었다.
표제작 <회색인간>을 비롯한 1권의 단편들은 극한 상황에서 의미도 목표도 없는 노동을 강요받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로 변주한다. 인물들은 지저(지하?) 세계, 무인도 등에 조난되어 영문도 모르고 허겁지겁 일만 하다가, 생산성과 관계없는 활동을 억압하다가, 노래, 이야기 창작, 고백과 경청, 정서 교류 등을 통해 자신들이 있는 곳을 살 만하게 바꾸어 나간다.
이 줄거리들은 일면 빅터 프랭클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과 '의미 요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공장에서 단순 노동만 반복하느라 독서나 여가 생활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하니, 자신이 노동자로서 느낀 자괴감과 답답함, 글쓰기를 통한 나름의 정서적 해갈이 <회색 인간> 속에 비유적으로 녹아 난 셈이다.
책을 사서 읽을 여력이 되는 우리는 작가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가. 직업에 대한 평판, 받는 급여의 많고 적음, 문화생활 향유의 가능성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로-노동자인 독자 중에서 내 영혼과 금쪽 같은 시간과 청춘을 썩 내키지 않는 일에 투입해서 월급과 맞바꾼다는 자괴감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맥락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는 답답한 일상을 황당무계한 상상으로 견디다가, 황당무계한 소설 속 공간을 그럴듯한 일이 벌어지는 개연성의 세계로 변모시킨 작가의 노동 우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게 사는 건가'라며 속으로 한숨 쉬는 우리 노동자들로 하여금, 비생산적 시간과 활동이 우리를 살 만하게 만들어 줌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