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의 미래
알랭 드 보통 외 지음, 전병근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각자 자기 얘기만 하다 끝난 것 같아 아쉽기는 했는데 그래도 여러 관점을 보면서 내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된 건 같아 유익한 독서였디고 평하고 싶음. 매트 리들리가 가장 합리적으로 들렸음. 스티븐 핑커는 지나치게 과학과 데이타 신봉자인 것 같았고, 알랭 드 보통은 문학 예술 등 정신문화의 측면을 진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야기만 주구장창, 말콤 글래드웰은 블랙스완의 문제만 주구장창.

알랭 드 보통은 부자나라의 상실감 문제, 결함있는 호두의 문제 등 인간 고유의 정신적 문제를 들며 과학이 이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낙관적이고 오만한 태도는 오히려 문제를 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함. 즉, 그의 얘기는 실제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느냐 여부보다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문제 제기라고 볼 수 있음. 일리가 있는 얘기임.

그렇지만 비관적인 태도가 꼭 도움이 된다는 보장이 없으며 스티븐 핑커 말대로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음. 무책임을 유포하고 사회적 스트레스를 높일 가능성도 있음. 비관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교적인 성향이 있고 비관의 도취된 듯 보이는 경우가 많음.

그리고 과학자들이 실존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며 우울감 상실감 자본주의 모순 등 현대병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있음. 낙관주의라고 해서 실존적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님. 과학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과학이 그 문제에 손을 놓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과학 덕분에 현대사회의 문제점이 더 명확하게 밝혀진 부분도 많음. 실례로 자본주의 양극화, 풍요 속의 상실감 같은 현상들도 과학적 연구로 더 명확하게 진단되어 지고 있음.

오히려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실존적 문제를 증폭시킬 수도 있지 않은가? 문제를 외면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필요한 때 아닌가?

빈곤국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진보의 표식임. 이런 진보는 한동안 계속 일어날 것임. 문제는 모든 지구인이 먹고 살만해지고 나서일 것이며 그 이후의 진보는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알랭이 제기하는 문제일 것임. 이때가 되면 기술적 경제적 발전 자체는 인간의 행복에 의미가 없어질 것이며 진보의 개념 자체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임. 알랭이 말하는 진보는 바로 이러한 진보를 말하는 것일 것. 즉 프레임이 다르다. 서구국가들에서 일어난 진보는 앞으로 계속 빈곤국에 전이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점에서는 인류는 한동안은 계속 진보할 것이며 이건 그다지 유의미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문제는 그 이후의 진보는? 서구국가들은 진보 과정에서 벽에 부딪쳤다고 볼 수 있음. 더 이상의 풍요도 자유도 이젠 별 의미가 없음. 인류는 한계점에 도달한 것임. 그 지점을 넘어 진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알랭이 제기하는 문제일 것. 이 점에 대해서는 나는 유보적임. 과학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현대사회의 상실감을 해결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지만 반대로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봄.

알랭 말대로라면 위대한 예술이 있으려면 세상에는 항상 부조리와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이 없어진다면 예술도 숭고도 사라져 버릴텐데... 뭐 어쩌자는 걸까? 실례로 아무 부작용없이 초월체험을 하게 해 주는 약이 발명된다면 항상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해 준다면 그건 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나? 그런 세상이 알랭이 바라는 세상은 아닐텐데?

문제는 영원히 해결 안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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