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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미널 조선 - 우리가 몰랐던 조선의 범죄와 수사, 재판 이야기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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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큼지막한 타이포그래피가 눈을 사로잡은 책이었다. (올해 읽은 책 중에 표지가 가장 멋있었다. 영어에서 한자로 이어지는 것도 좋고, 부드럽게 물결치는 디자인도 좋았다!) 그동안 현대사회의 범죄에 대한 기록은 자주 접해보았는데, 조선의 범죄에 대해서만 다룬 책은 처음 읽어보아서 더 끌렸던 것 같다. 1에서 9장으로 나누어진 챕터는 조선시대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 다양한 범죄의 사례를 다룬다. 단순히 사건과 그 사건의 결과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재판 제도, 그런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던 시대적 배경과 맥락까지 같이 설명하여 소위 '역사 덕후'가 아니더라도 재미있게 읽으며 배워갈 수 있는 책이다.

 

 

조선인 사용 부작용 설명서

 위 제목은 저자가 직접 붙인 별명이다. 살인, 성범죄, 절도, 폭행, 강도 등등… 인간이 시대를 불문하고 저질러온 범죄는 조선에서 역시 일어났고, 조선인들이 남긴 가장 적나라한 삶의 모습이 되었다. 어느 사회이든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날뛰어 일어나는 범죄가 있는가 하면, 그 사회에서만 범죄로 명명되고, 벌을 받게 되는 안타까운 사례가 있다고 느낀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던 모양이다. 범죄에 연좌제가 적용되어 가족 전체가 처벌받는 것은 물론이고, 재판이 끝나지 않아 무고하게 몇십 년간 감금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사건이 일어난 마을 전체가 수사와 심문을 빌미로 죄인처럼 다루어지기도 했다 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존장, 그러니까 웃어른을 고발하면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은 부정한 수령이 있어도 고발할 수 없었고, 아내가 가장을, 종이 주인을 고발할 수 없었다. 아마 화병으로 죽는 사람도 여럿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예컨대 아동 성범죄 같은 경우는 실록에 7건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건의 범인들이 하나같이 사노나 죄수였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인데, 부유층이 집안의 종을 겁탈하거나 죽여도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끔찍한 일들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존장고발죄를 명문화한 왕이 세종이라는 건 아이러니했는데 새삼 누구에게나 양면성이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수업 시간에 단편적으로 배운 조선사가 지겨운 사람, 그냥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 역사에 관심을 가져보려는 사람 모두에게 추천할 만한 내용이다. 다만 내용이 내용이어서 속이 좀 답답해질 수도 있지만 과거의 처벌 방식이나 처벌 과정 등 생소한 부분에서 느끼는 재미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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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우일 그림,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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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동화책을 읽었다!

동화의 매력은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야말로 그런 책이기 때문에 집에서 캐럴을 들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 제대로 내고 싶은 사람들은 미리 한 권씩 구비해두시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하루키의 작품 하면 굉장히 오래전에 출간되어 낡은 표지의 『상실의 시대』가 먼저 떠오르는데,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귀엽고 유머러스한 작품.

작품 속에는 '양 사나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일종의 마니아 집단인 모양이다. 이들은 여름에도 양털 옷을 입고 살아가며 12월 24일 돌아가신, 성양 어르신을 모신다. 그를 추모하기 위한 크리스마스 음악을 만들던 양 사나이는 창작의 고통에 '양 박사'를 찾아가고, 박사는 그가 저주에 걸려 작곡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다소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저주를 풀기 위한 해결책이란, 바로 성 양 어르신이 돌아가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

그리고 양 사나이가 실행에 옮기면서 기상천외한 모험이 시작된다. 결말은 직접 읽으면서 확인해보시면 좋을 것 같다. 매 페이지 빠지지 않는 알록달록한 일러스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양 사나이 특유의 시무룩한 표정이며, 독자가 열어보고 뜯어볼 수 있도록 구성된 페이지 등등 동화 특유의 재미있는 포인트가 많다. 초판 한정으로 같은 일러스트 작가님의 엽서도 들어있으니 지금 구매하면 일석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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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퍼포머, 최고의 성과를 내는 1%의 비밀
모튼 한센 지음, 이지연 옮김 / 김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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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하게 일한다는 것은 몇 가지 활동을 선택하고 그것을 목표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내 일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프롤로그, 16페이지

 주변을 돌아보면,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놀랄 만큼 다른 성과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에게는 동료 나탈리가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책 프롤로그에서 그는 야근도 주말 근무도 절대로 안 한다는 나탈리가 자신보다 뛰어난 결과물을 내놓는 현실에 화가 났었다고 밝힌다. 이는 저자가 일반적으로 '왜 누군가는 회사에서 남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는지'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업 성과에 초점을 맞추어 시행된 연구 기반의 책이지만 겨우 과제를 할 때마다 벽에 머리를 박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무척 유용한 책이었다. 설문조사와 통계분석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똑똑하게 일하는 7가지 방법' 가르쳐 준다. 그중에는 물론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천은 못 했던 그런 내용도 있는가 하면, 통념을 뒤집는 내용도 있다. 좋은 점이라면, 단순히 직장에서 성공하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직장 밖에서 워라밸을 지키며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분량을 할애했다는 것이다.

잘 짠 오렌지는 그냥 가만히 두는 게 낫다

전통적으로 인재들을 갈아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에서는 아직도 장시간 근무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되고, 연간 근로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나 미국과 일본보다 연 200시간 정도를 더 일하고 있으니(자료: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4044951&code=61141111&cp=nv) 회사가 직장인들을 쥐어짜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아르바이트를 할 때조차도 시급을 더 받지 못하고(^^) 추가 근무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시간 일하면 성과가 올라갈까? 지금 만연한 '근면성실'식 사고방식은 '그렇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좀 더 복잡하다.

71페이지

 저자는 주당 노동시간에 따라 성과가 감소하는 연구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지금 만연한 '근면성실'식 사고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시간이 주당 50시간에서 65시간 사이가 되면 추가시간이 주는 이점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즙이 다 떨어졌는데도 갈려나가고 있는 오렌지는 어쩌면 그 자체가 한국에 대한 비유 같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적은 오렌지를 가지고 최대한의 주스를 만들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해왔다. 모튼 한센이 단호하게 밝히는 것처럼 오렌지는 결국 아무리 세게 짜도 더 이상 과즙이 나오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잘 짠 오렌지는 그냥 가만히 두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는 무식하게 오래 일하기보다 일하는 방식을 바꿀 것을 추천한다. '가치'에서 출발해 '목표'로 나아가는 업무 재설계 활동을 통해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질 좋은 결과를 만들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피상적으로 보이지만, 이 책의 장점은 적절한 예시를 통해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거다. 일하던 터미널의 실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관리인 괴리츠는 일을 줄이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해, 일하는 방식 하나하나를 꼼꼼히 체크하고, 허점을 찾아 터미널 전체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 손으로 오렌지 껍질을 쥐어짜는 게 아니라 남은 껍질로 팩을 만든 셈이다.

뒷마당에 바위가 있으면 어떻게 옮겨야 할까?

물론 힘 좋은 이웃 다섯 명을 불러 다 함께 씩씩거리며 들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렛대와 지렛목을 이용한다면 더 적은 노력으로도 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영리한 재설계란 그 유명한 '지렛대'를 찾아서 영리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85페이지


밑은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문장이다.

p. 90_ 가려운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냥 징징거리는 소리이겠거니 하고 무시해버린다. 카먼도 성난 보험설계사들을 원망하며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 불평하는 사람을 만나면 짜증 날 때도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우리 모두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p. 120_ 매번 완벽하기를 바란다면 위험부담이 있는 환자, 새로운 환자, 어려운 환자는 맡지 않을 것이다. 제품 설명 방식을 바꿔보지도 못할 것이다. '잘못되면 어쩌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 성장을 옥죄는 일이다.

p. 124_ 최고의 성과를 내는 사람들은 쉬지 않는다. 계속해서 배운다. 1장에 등장한 초밥 요리사 지로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여든다섯의 나이에도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더 맛있는 초밥을 만드는 거예요" 영화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p. 134_ 열정과 목적의식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열정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목적의식은 '기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열정은 '세상이 나에게 뭘 해줄 수 있는가'를 묻지만, 목적의식은 '내가 세상에 뭘 해줄 수 있는가'를 묻는다.

p. 195_ 제프리 페퍼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는 《권력의 기술》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나의 어젠다를 진전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흔히 자신의 걱정거리와 목표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입장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는 상대가 그냥 '이해를 못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더 많은 사실과 논증을 줄기차게 퍼붓는다.

p. 202_ 최고의 성과를 내는 사람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시키기 위해 합리적 논증만 펼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지지할 수밖에 없게 하는 강력한 원투 펀치를 갖고 있다. 첫째, 나를 지원해줘야 할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서 감화한다. 둘째, '똑똑한 투지'를 발휘해서 반대에 부닥쳤을 때 내 작전을 상황에 맞게 조절한다.

p. 217_ 회의에 참석하거나 팀을 짤 때 다양성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린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동종 선호'라고 부른다. (…) 케네디 대통령의 국가 안보팀에 속한 사람들은 비범하게 똑똑했을지 몰라도, 그 회의실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놀랄 만큼 서로 유사했다. 하나같이 엘리트 대학을 나온 40~50대 백인 남성이었다.

p. 272_ 우리는 협업은 많이 할수록 무조건 좋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연락하고, 연결하고, 조율하는 게 성공의 핵심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협업의 목적은 협업이 아니다. 성과를 높이는 것이다.

p. 295_ 싸움은 '아이디어'에 대한 것이어야지, 사람에 대한 것이면 안 된다. 올바르게 싸우면 토론의 질이 올라가고, 정서적 마찰은 가라앉으며,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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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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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요커>에서 가장 뜨겁게 읽힌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처럼 올해 가장 충격적인 책.

  작가분이 스티븐 킹을 즐겨 읽으셨다고 하는데 단편 하나하나가 스티븐 킹의 작품처럼 미스터리하면서도 재미있었다. 현실과 판타지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작품도 있었고, 아예 동화처럼 쓰인 작품도 있었고… 전체적으로는 앤젤라 카터의 소설과 스티븐 킹의 소설을 섞은 것 같다고 느꼈다. (존잼이라는 뜻입니다) 재작년 타 출판사에서 나온 단편집 『현남 오빠에게』를 재밌게 읽은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어 원문과 비교해서 읽으면 좀 더 나을 것 같다.

 

 

 아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혼자들은 언젠가 왕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공주와 결혼해서 보내는 삶이 끔찍하게 불쾌하지는 않을 거라고 저마다 새삼 결정을 내렸다.

 

 

  총 12개의 단편이 있었는데 표제작도 좋았지만 특히 인상 깊었던 단편은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와 「나쁜 아이」였다. 「캣퍼슨」이 #구남친 #새벽감성이라는 해시태그가 정말 잘 어울리는, 현실적이어서 무서운 이야기였다면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는 가장 동화 같은 줄거리에, 가장 색다르게 행동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공주가 제 뜻과 상관없이 결혼을 하게 된다는 내용은 어디서나 읽을 수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이상한 등장인물은 처음 보았다.

  시작은 이렇다. 왕은 공주의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공주는 그들에게 호의적일 뿐 어떤 관심도 표하지 않는다. 그러자 "공주가 너무 이기적이며 제멋대로다. 오만하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도 그녀가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자 왕은 딸의 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주는 깨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다.

  그럼에도 주변의 압박에 못 이겨 억지 결혼을 올리게 되는데 왕비가 된 공주와 새로운 왕은 퍽 괜찮은 사이로 보이지만, 어느 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왕이 왕비의 슬픔을 눈치채고 무엇이 그녀를 슬프게 하는지 묻는다. 그러자 왕비는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는 따로 있다고, 깨진 거울과 찌그러진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로 이루어진 괴이한 물체만이 자신의 사랑이라고 토로한다. 왕은 왕비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하지만 왕비는 왕비대로 미쳐가고, 왕은 왕대로 점점 미쳐간다. 그러다 결국 왕비가 왕을 몰래 죽여버리는데 뜻밖에 왕국은 멀쩡히 잘 돌아가며, 왕비는 남은 생을 다 살다가 자신의 얼굴만이 들여다보이는 망토 속 검은 형체와 함께 관 속에 묻힌다.

  언뜻 보면 평범하게 파국에 이르는 스토리지만 "모든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게 되기를" 희망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이것이 결혼을, 또는 로맨스를 원치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던 사회적 폭력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나 결혼 안 할 거야." 하고 말하면 "그래, 커서 두고 보자." 하던 부모님들이 얼마나 많던가. 사실 친구들끼리도 어렸을 적 "나 나중에 결혼 안 할 거야." 하고 말하면 "야, 그런 애들이 가장 먼저 결혼한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오고 갔다. 오늘날 결혼이 사람 대 사람의 '사랑'만을 상징하고 있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닐까. 곳곳에서 몰려온 구혼자들은 사실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고, 언젠가 왕이 될 수 있다는 기회 자체를 사랑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은 잔혹한 비유처럼 읽히기도 했다.

 

나는 울 수도 있었지만 울음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웃고, 또 웃었다. 알고 보면 언제나 이런 식이 아니었나?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단편 「나쁜 아이」는 실연 후 가스라이팅을 당하다가, 친구 커플에게 성적으로 학대받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이쯤 되면 정상적인 인물만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남자는 여자친구와 세 번째 이별을 했는데 자신의 문제를 친구 커플에게 불평하는 식으로 해소하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커플은 점점 남자를 불쌍해하고 동정하다가 끝내는 자신들의 노예 같은 하등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어느 날 남자는 자신에게 명령하던 친구 커플을 무시한 채 친구의 집을 떠나고, 사귀던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커플이 남자의 집에 들이닥치면서 심각한 문제가 터지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면 좋겠다.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 해? 싶은 결말이었고, '연애 문제 제발 남한테 상담하지 말기'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찌질한 남자 주인공과 미쳐버린 커플의 환상의 조화 왜 '너무너무 재미있지만 어쩌면 변태적일지도 모르는 재미'라는 평이 올라왔는지 알 수 있는 단편이었다.

  작가의 상상력이 극대화되었다고 느낀 단편은 「겁먹다」였는데, 이것도 다들 직접 읽어보시면 좋겠다. 시작은 팬 픽션 닷넷에 올라올 만한 이야기지만(주인공이 마법을 부려 집 지하실에 벌거벗은 남자를 소환한다...) 그 결말이 상상 초월의 것이다. 연약한 주인공이 엄청난 누군가의 힘을 받아 모험을 펼치는 일반적인 장르 서사와 달리, 주인공은 남자를 방치하면서 오히려 그를 빌미로 자신이 더욱 강하게 성장한다. 용이나 마법이 등장하는 장르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충격받을 법한 이야기라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볼 수 있다.

 

 

 

 삶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보다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고 응징하는 여성 서사를 읽은 것 같다. 이 소설이 2017년 전 세계적으로 왜 그렇게 핫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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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미래전략 2020 - 기술과 인간의 만남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미래전략연구센터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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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와 혁신 등의 키워드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하는 토론 대회나 학술 대회, 관련 도서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그럼에도 어떤 용어는 나 같은 인문대 학생이 접하기에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관련 책을 집어 든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서적이 한 가지 분야만 깊이 파고들어서 여러 가지 기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모른 체 넘어가기 마련이다.

『카이스트 미래전략 2020』은 사회, 기술, 환경, 인구, 정치, 경제, 자원, 총 7가지 주요 분야의 미래 전략을 알짜배기만 모아 설명하는 서적이다.

 535 페이지라는 쪽수가 무겁게 느껴지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생각보다는(!) 딱딱한 책이 아니다.

 중간중간 용어 설명도 적절한 편이고 누구나 알고 있을 만한 예시도 있어 좋았다. 소주제도 비교적 세부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편이니 전부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대목만 찾아 읽기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조금 지루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 읽기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공대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새삼, 기술이 정말 빠르게 바뀌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문과대 수업이 대개 과거의 유명한 서적, 이론들부터 차근차근 밟아 나간다면, 공과대학은 조금 더 빠른 템포로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살 때는 가장 최신 스마트폰이었던 아이폰 7이 어느새 구식 휴대폰이 되었고, 아이폰 8은 아이폰 X에게, 아이폰 X는 아이폰 11에게, 아이폰 11은 또 아이폰 11pro에게 밀리는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내가 지금 모니터 앞에서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동안에도 근처에서 얼마나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무서워지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태되고 있다는 거니까.

4차 산업혁명은 디지털 기술 주도의 변화이지만,

산업의 모든 영역에서 제품과 기술 간 융복합, 제조와 서비스의 결합, 대체 등의 다양한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기존 영역은 경계가 파괴되거나 새로운 영역으로 대체될 수 있다.

-55페이지

 정교한 기계가 허점 많은 인간을 대체하는 세상. 알파고의 등장 이후 미래에 특정 직업이 얼마나 남아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우리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전 세계 각국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직접 소설을 쓰는 로봇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이제는 예술적인 영역까지 기계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다방면으로 스스로의 가능성을 넓힐 필요가 있다는 거다. 발전에도 단계가 필요하듯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기계로 대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경계의 파괴는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기도 한다. 책은 제조와 소비 혁명이 만들어낸 소비자이자 생산자, 프로슈머 prosumer를 언급한다.

 

'기계의 영역'인 제조에 드는 비용이 줄어드는 대신

디자인이나 아이디어, 혹은 마케팅이나 서비스 같은 '인간의 영역'에서의 부가가치가 증가하며, 그럴수록 이들의 활동은 더욱더 확대될 것이다. 프로슈머는 4차 산업혁명에서의 제조와 소비 간 소통 채널인 셈이다.

-57페이지

 이제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단순노동을 반복하던 사람들은 사람보다 똑똑한 프로그램의 등장으로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생산의 개방화'라는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을 이용한다면 우리는 기획자인 동시에, 생산자, 그리고 또 소비자의 역할을 동시에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부터 계속 언급만 되었던 개인용 3D 프린터가 실제로 상용화되어 사용되고 있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으로 거대 자본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물건을 공유하는 식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 나도 몇 번 이용해보았던 '에어비앤비'라든지 '우버' 같은 앱은 빅데이터 활용을 통해 정말 다양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미래학자들이 예측한 '산업사회 이후의 시대'에 관한 것이었다.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정보 사회 이후에 '드림 소사이어티'가 도래할 것이라 예측했다고 한다. 그가 설명하는 '드림 소사이어티'란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수익성이 좋지 않았던 자수정 광산이 이야기가 부여된 테마파크로 탈바꿈한 뒤 부흥에 성공한 일화는 단순히 만화나 소설 속뿐만 아니라 사업을 하는 데도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리는 예시다. 미래라고 하면, 단지 극도로 기계화된 세계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런 문화 산업이 발전한 사회를 예상할 수도 있다니. 아무리 CG 기술이 발달된다고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이 애니메이션만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점들을 통해 승승장구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콘텐츠 산업들은 미래에 더 빛을 발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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