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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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삶 비열한 삶

 

지워지지 않는...

감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색(色)을 띠게 한다. 사람들은 대개 여러 빛깔을 띨 수 있고, 그 여러 가지 색(色)을 실현시키며 살아간다. 하지만, 특수한 감정에 사로잡혀있을 경우, 그 사람의 색(色) 또한 특정한 빛깔을 띨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사람을 속박시켜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날 수 없도록.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그저 뒤로 물러서는 게 전부이도록. 그들의 삶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어두운 그 빛에 사로잡혀있었다. 그 빛에 그 감정 안에 갇혀있었다. 그 절망 안에 머물도록. 그들이 절망으로부터 물러서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또 다른 절망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빈디시와 카타리나가 그랬듯이 아말리에 또한 결국, 절망하게 된다. 그들은 그 절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살기위해서.

사람들은 특수한 상황에서의 특수한 경험을 잊지 못한다. 인간은 평생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평생을 잊지 못해서 고통받기도 한다. 빈디시는, 카타리나는, 아멜리아는 피해자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갖고 있는. 그들에게 상처는 대물림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 또 고통받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도 치명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때의 아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삶의 마지막 강을 건너기 전까지 말이다.

그들에게 삶은 치열했다. “카타리나는 빈디시처럼 죽음을 보았다. 카타리나는 빈디시처럼 살아 돌아왔다. 빈디시는 자신의 삶을 얼른 카타리나에게 붙들어 매었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왔다. 얼른 다른 이에게 자신의 삶을 매어야만 살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들의 삶은 무엇도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그들의 삶은 꿩처럼 날 수 없었다. 이미 그들은 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날개를 느낄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들이 이전에 서로에게 기대어야 생존할 수 있었듯이 이번에 그들은 여권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손내밀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또 다른 도피처를 찾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날개를 접고, 다른 시도로써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빈디시는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여자고, 또 배가 몹시 고팠겠지.’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울분의 감정은 폭발적으로 치솟곤 한다. 그 감정은 아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하지만, 빈디시는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게 현재를 살지도, 미래를 꿈꾸지도 못한다. 그의 기억은 아직 과거에 얽매여있다.

그곳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을 선택하게 했다. 그들은 아내의 엄마의 아픔을 잊지 못했듯이 앞으로 딸의 아픔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픔의 대물림이었다. 그곳의 누구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 아픔은 의도적이지 않았다. 누구도 그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막지는 못했을 뿐이다.

그들이 꿈꾼 것은 또 다른 비상이 아니었다. 단지, 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전에 빈디시가 카타리나에게 자신의 삶을 매도록 하면서 살고자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의 물러남을 택함으로써 그들은 살고자 했다. 그들이 꿈꿈 것은 비상(飛上)이 아니라 비상(非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오직, 살기위해서. 그렇다면 그들의 삶과, 선택은 왜 변화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들은 아픔 안에 절망 안에 갇혀있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누구의 선택이었단 말인가.

집을 떠나기 전, 아픔에 잠겨있는 아말리아에게 빈디시는 “이별은 원래 힘든 법이야.”라는 말을 한다. 빈디시는 아말리에의 아픔을 느끼긴 하지만, 그 아픔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랬기에 그녀의 아픔을 위로할 순 없었다. 결국, 그것은 아말리에의 아픔이었다. 살기 위해서 택한 것들이 끊임없이 상처를 주었다. 살기 위해서한 선택이 삶을 힘겹게 만들어버렸다. 삶은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만들어놓고, 다른 이의 아픔조차 위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아픔 그 감정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겐 날개가 있지만 날아오를 순 없었다. 우리는 거대했지만 힘이 없었다. 우리가 짐승보다 더 강한 것은 오로지 두려움과 외로움의 감정일 뿐이었다. 우리는 항상 삶을 꿈꾸었지만 삶은 늘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떠도는 인생...

"낯선 올빼미는 밤마다 마을을 찾아온다. 낮에 어디서 날개를 접고 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 부리를 다물고 잠을 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라곤 올빼미와 뻐꾸기와 파리들이 전부였다. 날 수 있어서였을까 그들은 때때로 우리를 찾아왔다. 날아가 버리면 그뿐인 그것들은 그렇게 날아왔고 그렇게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본다.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그것들은 여권을 사서 떠나는 우리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그것들도 우리도 떠돌이가 분명한지 모른다.

카타리나의 말처럼 우리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지금까지가 그랬듯이 앞으로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지, 어디에 머물게 될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살기 위한 곳을 찾아 떠돈다. 돌아돌아 정착하는 곳이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한 곳에 머물러있을 수 없듯이 자연의 흐름에 따라 불어불어 떠나듯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흐름에 따라 떠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 우리의 운명이겠지. 순간순간 불어오는 바람처럼 떠날 수도 있는 것이.

떠나기 전, 카타리나는 경사진 빨간 지붕들을 바라보면서 꼭 난생처음 보는 마을 같다고 말한다. 내가 살던 곳이 낯설어지는 순간, 떠돌 수밖에 없는 우리의 떠돌이 인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떠도는 인생,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인생을 손에 잡아 쥘 수도 없다. 우리가 치명적인 선택을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여권에 불과하니까. 그곳에 머물겠다던 야간 경비원의 인생도 결국, 떠도는 인생을 마찬가지일 것이다.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인생은 모르는 것이니까. 지금까지 그랬듯이 누군가가 떠났듯이 누군가를 새롭게 만났듯이 알 수 없는 인생, 떠도는 우리의 인생은 같은 것이니까.

우리는 우리의 감정조차 잘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아픔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상처 입히고, 상처 입은 누군가를 위로하지 못하는지도. 인간은 감정에 휩싸여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저마다의 고독감에 사로잡혀 살아갔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통제할 수 없었다. 감정을 뜻대로 조절할 수 없으니 인생 또한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던 그 집이 어느 순간 낯설어지는 때에,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무엇을 그리며 살아왔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을 그리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결국, 그것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건 누구의 탓이 아니니까. 그러니 그들도 모르는 것이겠지. 살면서 그들과 같은 상실을 경험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결정되어 버리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는 언제나 무관한 것이니까. 달아나보려고 해도 그것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오곤 하니까. 밤이 되면 내 뒤에서 길게 그림자가 되어 나를 따라오곤 하니까.

 

잃어버린 무엇

카타리나가 생존을 위해서 했던 선택이 카타리나의 먼 미래에까지 와 상처를 주고 있다. 그의 남편은 그녀를 보면서 끊임없이 그녀의 과거를 떠올린다. 아프게.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 상처 입는다. 그리고 어린 날의 아말리에를 보면서 생각한다. 언젠가는 아말리에 때문에 크게 망신당할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여자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느끼기도 한다. 함께 살아가면서. 그가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야간 경비원은 말한다. 여자들은 사람을 속인다고 하지만 그도 결국은 새로운 아내를 맞이한다. 그들은 함께 사는 사람을 의심한다. 그것은 그들이 잃어버린 무엇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믿음 같은 것. 그리고 그 믿음이 깨진 것은 상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 의문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것이며 스스로를 외롭게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찾아갔던 모피가공사는 빈디시에게 말한다. 그런 곳에도 그런 산 속에도 여자들이 있더라고. 어디에나 있는 그러나 소중한. 그래서 언제나 함께해야 하는 것들에 의심을 갖기 시작한 건 상실을 겪고 믿음이 깨지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 아팠을 테지만 무엇도 잡히지 않는 그들의 삶에서 쉽게 희망을 품는 것 또한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디의 증조할머니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장례를 치른 남편을 찾아 떠돈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무책임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녀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상실을. 그래서 떠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떠돌아다닌다고 이미 죽은 남편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건 불가능한 것이니까.

그들은 믿음을 잃었고 희망을 잃었고 사람을 잃었다. 그것이 그들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삶은 그들에게 비열하기까지 했다. 상처주고 상처 입혔다. 그들은 단지 살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살기 위해선 상처입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들은 그 상실로 인해 머릿속이 지끈거리거나 뱃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실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치료할 수도 없다. 상실의 시대 속에서 다른 감정까지 잃어버린 채 오직 외로움이나 고독감에 휩싸여있던 그들의 아픔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외롭다는 생각도 억울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들에겐 불편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들의 아픔이 대물림 되었듯이, 그들의 아픔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길게 그림자 져 있는 우리의 고독감은 밤이 되면 나타나 우리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때때로 그것은 믿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과거가 때로는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미래를 경험에 비추어 보곤 하니까요. 그래서 책을 읽으며 현재가, 미래가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들의 삶을 어루만져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이야기 안에서가 아니라도 말이죠. 이야기 밖에서라도. 당장 지금이 아니라도.

기억되는 것이 기록되는 것인지 기록되는 것이 기억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외롭지만, 떠도는 인생이지만 우리가 언제나 희망을 품듯이 또 그 희망은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기도 하듯이 상처가 치유되기만을 꿈꿔봅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지만, 가장 알맞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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