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풍부하고 섬세한 감정과 사고는 수없이 많은 신경세포들로 구성된 축축하고 물렁물렁한 뇌로부터 생성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마음과 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경생물학적 지식과 더불어 심리학, 경제학 등의 행동과학적 이론과 연구 방법이 필요하다. 이를 반영하듯 최근에는 인지 신경과학, 사회정서 신경과학, 신경 경제학, 신경윤리학 등 융합 학문이 속속 등장해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본 강의는 다양한 인간 행동의 근거가 되는 뇌 신경 회로를 탐구하고 이러한 발견들이 현재와 미래의 인간 행동에 미치게 될 영향을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통합적인 관점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 2011년도 2학기 '느끼는 뇌, 소통하는 뇌' 수업목표 및 개요


대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수업을 꼽으라면 항상 먼저 떠오르는 과목이 있다. 바로 과학/수학 분야의 교양 과목 <느끼는 뇌, 소통하는 뇌>가 생각난다. 심리학과 이도준 교수님의 유머러스하면서 차분한 강의는 물론 심리학 실험 참여, 다양한 영상 등 다채롭게 꽉꽉 채워진 수업이었다. 졸업하려면 반드시 과학/수학 관련 분야 교양 수업을 들어야만 했는데, "문송합니다."의 대표주자 철학과를 나온 내게 '뇌, 뇌'는 빛이요, 희망이었다. 쉽고 재미있게 '뇌'라는 소재를 다방면에서 분석하고 바라보는데 굉장히 유익하고 흥미로웠다. 특히 매우 독특하고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다양한 뇌손상 환자들의 사례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다. 실인증, 얼굴실인증 등 이원론의 한계를 설명하며 등장했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이제서야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책을 읽으며 접하는 많은 환자들이 <뇌, 뇌> 수업때 들었던 사례들과 겹쳐지더라. 5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나의 대뇌 피질 모퉁이에는 인상적이었던 학창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었나 보다.


자폐증 환자이자 지능도 뒤떨어진 그가 구체적인 것 그리고 '형태'에 대해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독자적인 스타일의 자연주의자, 자연파 화가였다. 그는 세계를 '형태'로 파악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을 보는 순간 강렬한 느낌을 받아 그것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힘과 함께 우화적인 표현력도 지니고 있었다. 꽃과 물고기를 매우 정확하게 그릴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의인화, 상징화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것을 꿈으로 뒤바꾸거나 익살스럽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보통 자폐증 환자들이 상상이나 풍자 혹은 예술과 관계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 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中


저자 올리버 색스는 타고난 글쟁이다. 신경장애 환자들의 다양한 임상 사례를 모아둔 책이 이렇게 문학적일 수 있다니! 딱딱하고 전문적인 단어들로 빼곡히 가득 찼을 것만 같은 소재들을 읽다 보면 오히려 가슴이 짠하고, 어느 순간 뭉클해지는 부분도 상당하다. 임상실험 사례들이 20개가 넘게 나오다 보니 단편 문학 같은 느낌도 든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분명 학술적이지만, 학술적이지만은 않다. 본인의 연주를 위해 잠시 약을 먹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이, 꿈에도 그리던 청춘을 다시 만나고 차라리 지금의 병을 계속 안고 가겠다는 환자, 눈 앞에 보이는 형을 알아보지만 추억할 수 없는 사내. 기이한 환자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병명, 증세, 치유 여부 등의 차가운 단어로만 가득하지 않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올리버 색스가 주목하는 건 '병'이 아니라 병을 가진 '사람'이다. 단순히 그들을 새로운 케이스, 색다른 치료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바라본다. 긴 시간 대화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관찰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의사다. 


"나는 인간이 어떤 부분을 상실하거나 손상당한 상태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새롭게 적응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의 말처럼 그는 환자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고, 나아가 그들의 주체성을 주목하며 응원했다. 그래서 '뇌'라는 신비로운 소재를 따뜻한 목소리로 기록할 수 있었다. (결국 글쓰기를 멈추지 않던 그는 암투병 끝에 지난해 타계했다.)


"내 몸은 말하자면 눈과 귀가 없어진 것과 같아요. 내 몸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단 뜻이지요."

그녀는 자신의 상태 즉 '빼앗긴' 감각을 적절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상태는 말하자면 감각이 소리 없는 암흑에 빠진 상태였고 실제로 눈이 보이지 않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어쨌든 그녀도 나도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오늘날의 사회에는 그런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으며 따라서 '공감'을 얻기도 어렵다. 상대가 장님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근심 어린 동정을 보낸다. 우리는 그들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고 그것에 따라 그들을 대한다. 그러나 크리스티너가 비틀대는 동작으로 어설프게 버스를 타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잔뜩 화가 난 모욕적인 언사가 퍼부어질 뿐이다. 

-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中


사람의 얼굴과 사물의 형태를 구분할 수 없는 음악교사, 과거의 기억이 특정 시기 이후로는 하얗게 증발한 사내, 왼쪽만 보지 못하는 여자,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바흐의 복잡한 기교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지성을 가진 저능아 아이, '캘린더 계산기'라 불리며 엄청나게 큰 소수를 가지고 노는 쌍둥이 형제. 올리버 색스가 만난 수많은 환자들은 지나치게 독특하며 평범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최근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뚜렛 증후군, 틱 장애가 등장해서 대중들은 나름 익숙해졌다. 하지만 실제 눈 앞에 그들을 마주했을 때 당황하지 않을 보장은 없다. 갑작스레 나의 얼굴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한다거나, 아무런 맥락 없이 욕설을 내뱉는다면 쉽게 넘어가기 힘들 게 분명하다. 책을 읽으며 환자는 물론 환자 가족들이 겪게 될 고초와 아픔이 떠올랐다. 교감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해질 무관심과 편견, 냉대는 결코 그냥 지나치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적어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은 독자라면 다소 다른 그들의 환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행동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윤리적이거나 실존적인 딜레마에 빠졌을 때는 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작과 지각이 딜레마의 근원을 이룰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뜻하지 않은 성과를 얻을 수는 있는 것이다. 단 하나라도 좋으니 무언가 돌파구를 얻기만 한다면(단 하나의 동작이라도 좋고, 지각이라도 좋고, 충동이라도 좋고, 최초의 한마디라도 좋다. 헬렌 켈러에게 '물'이라는 단 한마디가 그런 역할을 했듯이 말이다) '무'였던 세계가 '전부'로 뒤바뀔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충동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행동도 아니고 반사운동도 아닌 오직 충동이다. 충동이야말로 행동이나 반사운동보다 그 존재가 훨씬 명백하며 또한 좀더 신비적이다. 우리는 매들린을 향해서 "이것을 하세요."하고 말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충동에 기대를 거는 것뿐이었다. 충동에 희망을 걸고 충동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충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엇다.

- 매들린의 손 中


올리버 색스는 지금껏 소외되었던 우뇌의 영역을 재조명했다.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의 세계. 총 4부로 구성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일반 병동에서 지나칠 수 있었던 시각인식불능증, 코르사코프 증후군 등을 재조명했다. 짧은 글을 마무리하며 매번 '뒷이야기'를 통해 비슷한 사례, 추후 증세 등을 소소하게 덧붙이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한편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뇌질환이 소리소문없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물론 알콜 중독, 자동차 사고 등 뚜렷한 인과 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미지의 영역인 뇌의 특성상 아무런 징후 없이 걸리는 병도 꽤 있었다. 하루아침에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면? 자고 일어나면 모든 세상이 왼쪽이 보이지 않는 반토막이 된다면? 글을 다 쓰고 공책을 덮었는데 내 기억이 오직 2002년에만 머물러 있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일들은 언제든지 준비 없이 나를 찾아올 수 있다. 건강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온 책 속 인물들이 그랬듯이. 새삼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후회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왔다. 


레이는 투렛 증후군 환자이며 할돌의 투여로 인공적인 균형을 강요당하고 그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지만, 그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극복해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수하는 자연 그대로의 자유라는 생득권을 빼앗겼는데도 그는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어떤 의미로는 그것을 극복했다. 그는 니체처럼 이렇게 외치고 싶을 것이다.

"나는 갖가지 건강 상태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지금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다. 병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고조차 말할 수 있다. 지독한 고통을 극복했을 때야말로 정신은 궁극적으로 해방된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생명체로서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생리학적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레이는 새로운 건강, 새로운 자유를 발견한 것이다. 병을 앓으며 갖가지 부침을 경험했기 때문에 발견한 것이다. 그는 니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즐겨 부르는 상태에 도달했다. 드물게 보는 유머, 사나이다움, 강한 정신력을 얻은 것이다. 투렛 증후군으로 고통을 받았으나, 오히려 투렛증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익살꾼 틱 레이 中


하지만 언제나 이런 뇌 손상이 그들에게 불행을 선물할 거라 단정 짓기 어려웠다. 악마의 재능처럼 그들에게 천재성을 선물하는 것도 결국엔 뇌란 신비로운 존재기 때문이다. 익살꾼 틱 레이는 할돌 복용을 중단하고 열광적인 드럼 연주에 격렬히 몰두했다. 시각적 기억으로 비범한 계산 능력을 보이던 쌍둥이 형제는 사회성 학습을 명목으로 강제로 떨어진 이후 평범한 저능아가 되었다. 큐피드병에 걸린 90세 노부인은 팔팔한 기운을 잃지 않기 위해 뇌의 탈억제 상태를 되돌리지는 않는 처방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단순히 비정상의 영역이 바뀌어야만 하는 교정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니체가 표현한 '위대한 건강', 도스토예프스키가 명작을 펼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간질처럼. 그들에게는 단순히 치료해야만 하는 병이 아니라 삶의 원동력이자 새로운 활력소, 아니면 바로 그 삶 자체일 수도 있다. 역설적이지만 병 때문에 고통을 받지만, 오히려 병 덕분에 고통을 치유받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병의 유무로 그들의 인생을 섣불리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단순히 일상생활을 조금 더 편하게 누린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우월하다거나 존엄하다고 판단할 근거나 정당성은 절대 없기 때문이다.


혼자 남게 된 나는 가슴이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이 있을까? 이렇게 기묘한 일이 있을까? 그의 인생이 망각의 세계에서 녹아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다시 노트에 적었다. "그는 순간 속의 존재이다. 말하자면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과거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순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좀더 무미건조하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밖의 점에서는 신경학적 검사 결과 완벽하게 정상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인상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아마 코르사코프 증후근 즉 알코올로 인해 일어난 유두체 변성이라고 여겨진다."

- 길 잃은 뱃사람 中


가장 가슴이 아프고 아련한 이야기는 <길 잃은 뱃사람>이었다. 명량하고 사교적이며 활발한 성격의 지미는 49살이다. 막힘없이 말도 잘했고 해군에 근무할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승선했던 잠수함의 이름, 동료 승무원의 특징, 모스 부호까지도.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학교 시절에서 해군 시절로 넘어가면서 '현재형'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레 나이를 묻자 머뭇거리며 "열아홉 살"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거울을 들이밀자 당혹해 하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햇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애써 진정시키고 잠시 후 다시 면담을 시작하자 그는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밝게 인사를 건넸다. 지능도 뛰어나고, 성격도 유쾌하며 건장한 체형의 그는 기억은 1945년에 멈춰있었다. 그의 세계에는 우라늄이 마지막 원소이며, 달은 아직 미지의 세계였다. 과거가 없기에 미래가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순간순간에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무엇보다 가슴 먹먹한 장면은 유일하게 기억하는 혈육인 형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반가워했지만 "진짜 빨리 늙는 사람이 있구나."라며 늙은 형을 애써 이해할 뿐이었다. 일기쓰기, 레크레이션 프로그램 참가 등 다양한 처방을 시도했지만 지미는 '신경심리학적'으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당에서 자신의 영혼을 얻었고 예술적인 교감, 영혼의 접촉을 통해 재통합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새삼 '기억'이란 인간을 형성하는 필요조건일진 몰라도 충분조건이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미는 기억 없이도 아쉽지만 작은 평온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는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일까?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늘 있어온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신경학(또는 신경심리학)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정상이었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도저히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증세가 심각해 보이기도 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할 정도인 사람이 어떻게 음악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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