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의 초상 문학과지성 시인선 455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시간


- 김행숙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밤의 고속도로


- 김행숙


바퀴 달린 것들이 소리를 지를 때

창문을 흔들며

무엇을 운반하는가


고속도로는 검은 채찍 같다

채찍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빛, 빛,

빛의 그림자들처럼

세계의 난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누군가 난간처럼 서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문지기


- 김행숙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 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

이다.


나의 천직을 이유로 울지 않겠다,라고 썼다. 일기

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에코의 초상

- 김행숙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

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 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

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 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

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

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

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에코.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울림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 

공허하고 슬픈 공동체 속에서 과연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지독한 외로움, 소름돋는 무서움, 철저한 소외감. 

김행숙 시인은 피할 수 없는 슬픔의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꿈꿨다. 존재, 시간, 말.. 하이데거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시어 틈바구니에서 시인은 일상을 돌아봤다. 맨 앞장 시인의 말처럼 '우리'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 가볍지만, 가벼울 수 없는 필연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새로운 관계의 충분조건은 아닐지 몰라도, 필요조건인 건 분명하다. 여전히 첫장의 강렬함을 채운 시인의 말이 아른거린다.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던 순간도 많았고, 생각보다 빠르게 곱씹을 거리들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인의 말'만큼 인상적인, 그리고 충격적인 첫 음절은 없었다.


시인의 말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모두가 깊이 앓고, 진하게 빠졌으면 좋겠다. 아무리 무섭고 두려운 출발이라도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있는 일일테니. '너'와 '나'를 채워주는 '우리'란 관계가 결국엔 비극의 시작이자 종말일 수 있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