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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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 이성복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이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遲鈍의 감칠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 속에 입장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구근 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천국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시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시대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시대의 어리석음과

또 한 시대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 마라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고향을 버렸다 꿈엔들 네 고향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고향 대신 물이 흐르고 고향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성기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성기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시,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시를 쓴다는 일은 어찌 보면 고통을 마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섬세하게 언어 파괴를 즐기며 (문장을 뒤죽박죽 배열하고, 단어가 테트리스처럼 쏟아져 내리는 등) 개인의 고통을 보편적 삶으로 확대하는 이성복 시인. 그도 '아들에게'란 시에서는 조근조근 숙제를 던져준다. 결국 칼 끝을 향해 가는 필연적인 인간의 운명을 다시 확인시켜주면서도, 결국 '시'라는 하나의 숙제는 던져준다. 그것을 자유롭게 풀어내기란 어렵겠지만, 그걸 마침내 이뤄냈을 땐 다알리아 꽃이 피는 찬란한 인생의 밝은 면은 잠깐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일의 연속에서 잠시나마 그걸 잊을 수 있는 마취제 정도가 더 현실적일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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