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강렬한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 터키 이스탄불의 어두컴컴한 우물 앞에 서 있었다. 6·25 전쟁 참전에 빛나는 형제의 나라, 페네르바체·갈라타사라이로 유명한 광적인 축구 열기, 수원역 앞에서 항상 은은한 향신료 냄새를 풍기며 바라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케밥. 이제 터키를 기억할 때 축구선수 누리 사힌, 하칸 수크르뿐 아니라 <내 이름은 빨강>으로 노벨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도 떠올릴 것이다.

 

표지부터 알록달록한 <내 이름은 빨강>은 일반적인 추리 소설의 느낌이 나면서도 독특했다.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이라는 이국적인 공간 탓도 있지만 책의 첫 장부터 황당하게도 시체가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작가는 술탄의 세밀화가 엘레강스가 살해당한 장면이 등장하고 역으로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런 방식은 매우 신선했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수많은 화자가 등장하며 이 중에 몇몇 인물이 용의 선상에 오른다. 심지어 동물, 사물 혹은 죽음까지도. (죽은 몸, 카라, , 살인자, 에니시테, 오르한, 카라, 에스테르, 세큐레, 한 그루 나무, 나비, 황새, 올리브, 금화, 죽음, 빨강, , 이야기꾼, 오스만, 악마, 여자, 두 명의 수도승,까지 화자로 등장한다.)

 

살인자가 직접 참혹한 현장의 생생함을 표현하고, 다시 유력한 용의자 나비, 황새, 올리브 중 하나의 입을 빌려 자신의 알리바이와 정당성을 차근차근 언급한다. 세 명 모두 궁정화가로 각자 스타일과 서명, 시간의 중요성, 눈멂에 대한 토로하는데 동료 엘레강스의 죽음에 얽히고설켜 있다. 굳이 하나의 주인공을 뽑자면 바로 이름도 예쁜 카라. 사랑에 빠져 바보가 되어버린 카라는 오르한과 셰브켓의 엄마 세큐레와 함께 기이한 살인 사건의 비밀에 차근차근 다가간다. 그리고 마침내 화원장 오스만과 함께 축제의 서를 분석하던 카라는 베일에 가려진 범인의 정체를 찾아낸다.

 

사실 세밀화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어서 책을 읽으며 오로지 상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거듭 등장하는 휘스레브와 쉬린을 검색해보니 조금은 감이 왔다. 터키의 세밀화는 을 중심으로 하찮은 인간의 개성을 무시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인정받은 장인의 그림을 똑같이 묘사하는 특징을 지닌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원근법도 술탄의 영향력에 있는 이스탄불에서는 금기시되는 기법이었기에 문명의 갈등과 충돌의 실마리도 여기에 있다. 베네치와와 페르시아의 화풍이 묘하게 결합하는 과정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있는 터키의 역사와 닮았다. 이는 급격한 서구 문명이 고매한 동양 문화와 뒤섞이며 혼란스러워하는 우리나라 이야기 같아서 무척 흥미로웠다. 터키의 세밀화가가 눈이 머는 것을 찬양하듯이, 우리나라도 독 가마 속에서 불타오른 송 영감의 장인정신이 떠오르지 않는가?

 

한편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타고난 이야기꾼 오르한 파묵은 터키에 가본 적도 없는 머나먼 이방인에게 손수 그림을 그려주었다. (실제 오르한 파묵은 22세까지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면 그 느낌이 철과 동의 중간쯤 되지.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뜨거울 테고. 손으로 쥐어보면 소금기가 아직 남아 있는 물고기처럼 느껴지겠지. 입에 넣으면 입안이 꽉 찰 테고, 냄새를 맡으면 말 냄새가 나겠지. 꽃의 향기로 치면 붉은 장미보다는 국화 향기와 비슷할 걸세."

 

빨강을 표현한 그의 문장에서 오감은 쉬지 않고 활자에 반응했다. 우리는 단순한 시각으로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촉각, 후각, 미각 등 오감을 활용하여 빨강이라는 하나의 추상성을 적나라하게 마주한다. 과연 빨강이라는 강렬한 색깔 하나로 동서양의 문화 충돌, 인간의 애증을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범인이 집어든 빨간색을 담는 물감 병은 단순히 살해도구가 아니다. 아마 글을 쓸 때만 행복하다는 오르한 파묵이 너무나 서구화되어 이슬람 특유의 문화마저 잃어가는 터키에 대한 아쉬움 섞인 경고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숨소리를 들어보고 맥박까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더니 우물로 끌고 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미 돌에 맞아 깨져 있던 내 머리는 우물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얼굴과 이마, 볼도 뭉개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뼈들도 부서졌고 입안에 피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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