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
존 듀어든 지음, 조건호 옮김 / 산책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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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다. 특히 우리를 평가하는 대상이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면 두세 배는 귀를 쫑긋 기울이고 마음을 졸인다. 그러다 보니 형식적인 칭찬에도 위상을 높였다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사소한 비판에도 국제적 망신이라며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축구'란 공놀이에도 마찬가지다. 아시아의 맹주를 자랑하면서도 항상 축구 강대국의 평가에 민감하며 외신 보도를 자극적으로 전달하는 언론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다. (한국보다 더 황색저널리즘으로 물든 영국의 기사를 그대로 베껴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유럽파 출전 경기 평점 하나에도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위기설'은 박지성보다 지치지도 않고 쏟아져 나온다. 물론 객관적으로 한국 축구를 바라보는 해외 저널리스트의 칼럼은 몇몇 잡지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이 흥미롭다거나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뻔하디뻔한 '서문', '편집 후기'를 읽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대부분 칼럼의 중심은 아시아 축구 전반의 모습, 그 중에서도 탄탄한 J리그에 대한 것이었으니 배알이 꼴리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듀어든은 달랐다.

 

가디언, 포포투, 골닷컴 등에서 아시아 축구 전문 칼럼리스트로 활동한 존 듀어든. 국제적인 언론인이란 칭찬보다는 그저 원더걸스, 소녀시대에 하악거리고 삼겹살에 환장한 평범한 백인 대머리 아저씨란 소개를 그도 더 좋아할 것이다. (이번 시즌 블랙번의 강등에 흥분한 그와 성남의 부진에 '정신승리'만 강조하는 샤다라빠를 비교하면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그의 글에는 한국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날카로운 비판의 눈초리를 한 그가 엠파스 토탈사커에서 네이트로 옮기고 나서도 꾸준하게 칼럼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그의 K리그, 한국 축구, EPL, 아시아 축구를 바라본 칼럼, 인터뷰를 반가운 마음보다 고마운 마음에 얼른 구매했다. 그의 노력으로 실제 유럽 이적 시장에서 한국 선수의 경쟁력은 재확인되었다. 또 한국 축구팬은 스스로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 축구의 허점과 강점을 돌아볼 수 있었다. 단순히 활자 하나로 축구계, 특히 한국 축구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이가 있을까?

 

우선 그가 남긴 칼럼에는 전문성이 드러난다. 난 4~5년이 흐른 지금 책을 다시 보니 더 놀랐다. 축구계 승부 조작, 내셔널리그 승강제, K리그 아시안쿼터제, 해외리그 진출 등에 관한 칼럼을 읽으면서 그의 탁월한 전문성을 느꼈다. 대부분 몇 년 사이 한국 축구를 강타한 큰 사건이 아닌가? 축구의 본고장 영국에서 자라 아시아 전문 기자로 수많은 경기장을 누볐던 듀어든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베어벡, 아드보카트, AFC 회장 등 거물급 감독, 축구계 인물과 나누는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인터뷰는 고리타분한 질문&대답 형식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특히 오일 머니를 무기로 발전하는 중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J리그, K리그의 비교 분석은 한국인이라면 할 수 없는 영역의 글이었다. 이방인의 공정한 눈으로 바라본 문제점은 상당히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분명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국적만으로 진정 이방인이라 할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때 처음 한국을 찾은 이후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그는 이미 한국 문화에 푹 빠졌다. 심지어 블랙번 팬인 그는 칼럼에서 한국의 경기를 보며 '우리'라는 표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닝, 한국 음식 (특히 삼겹살!)을 이용한 참신한 비유는 놀라운 수준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듀어든의 글을 읽다 보면 K리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올스타전에 대한 제안, 이적 시나리오, 숨겨진 명승부, 안타까운 중계 현실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걸 보고 있으면 속이 다 시원하다. 최근에는 호주, 일본 선수의 이적에 관련해 쉽게 접하기 어려운 비하인드 스토리나 냉정한 실력 평가는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축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100%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개인적 축구 가치관이나 좋아하는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특별한 개념은 자라면서 차근차근 형성된 것이기에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천수에 대한 동정론이나 안정환에 대한 야박한 평가는 나와 100% 반대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듀어든이 쓴 이 책은 흥미롭다. 한국 축구 전반은 물론 세계 축구 흐름, 특히 EPL을 둘러쌓고 돌아가는 권력의 이동을 쉽고 재미있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편파적이지 않고 혹은 편파적으로 (K리그에 관련해서는!)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좀 더 관중에게 다가가며 선진 축구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협회 관계자는 듀어든이 제안한 여러 가지 마케팅, 외교 전략, 대표팀-리그 운영에 관련한 사항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축구와 나아가 한국을 사랑하는 만큼 따끔한 충고와 제언을 아끼지 않는 푸른 외국인이 항상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가 늘 EPL, 라리가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한국 특유의 친근하며 가족적이고 열정적인 분위기는 그 누구의 평가 대상이 아닌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다. 조금 더 자신 있게 어깨를 펴고 TV 속에서 펼쳐지는 남의 나라 축구만을 부러워하지 말자. 축구 종주국 영국 출신 듀어든도 말하지 않았는가? K리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리고 충분히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으며 팬과 멀리있지 않다고! 발걸음을 옮기면 열정의 놀이터 K리그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명승부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

경기장에 늦게 도착했을 때 아무 대가도 없이 출입구로 들여보내주던 사람들, 돈을 건넷 것도 아닌데 반갑다며 차가운 맥주캔을 손에 쥐어주던 팬들, 몇 골을 먹고 대패 중인데도 끝없이 노래 부르던 열정적인 젊은이들, 관중석에서 통닭 한 마리를 뜯으며 축구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 나는 이러한 것들로 인해 한국 축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유럽의 강팀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4강까지 진출한 월드컵도 즐겁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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