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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낯익은 이야기에서 건져낸 낯선 감동
아모스와 보리스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50
읠리엄 스타이그 / 시공주니어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이 책을 지난 여름, 선물로 받았다. "아모스와 보리스"의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톰과 제리" 같은 우리 부부가 떠올랐다. 톰은 고양이고, 제리는 생쥐다. 그런데 이 둘 사이는 그렇게 단순한 고양이와 생쥐 사이가 아니다. 비록 톰은 고양이지만, 영리한 생쥐인 제리에게 늘상 골탕을 먹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한나와 조셉 바바라 콤비는 그들 자체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이기에 통칭 "한나 바바라(Hannah Barberra)"라고 불린다. 한나 바바라 시리즈 중 하나인 "톰과 제리"를 내 동생은 넋을 놓고 보았었다. 입에 밥 숟가락 넣는 것도 잊은 채 넋을 빼놓고 보았기에 종종 야단을 맞곤 했는데, 어렸을 때는 나 역시 동생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조금만 나이가 들어 이 시리즈를 다시 보면 어렸을 적엔 왜그리 넋을 빼놓고 웃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배경과 소재만 약간씩 변화를 줄 뿐 판에 박힌 듯 빤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못되고, 음흉하지만 늘 골탕만 먹는 고양이 톰과 작고 힘없지만 영리해서 늘 승자가 되는 생쥐 제리 사이의 슬랩 스틱풍 액션이 반복되는 에피소드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리에겐 늘 사납지만 우둔한 불독 부자가 있어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해준다. 이 시리즈의 매력은 그런 역전과 반전의 미학에 있다. 현실 세계에선 당연히 강자인 고양이와 생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고, 음흉한 계획을 세운 톰의 흉계가 결국 톰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 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판에 박힌 이야기뿐이었다면 "톰과 제리"가 그렇게 인기있는 만화 시리즈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나 바바라 콤비는 종종 대중의 이런 반응을 알아채고, 톰에게 실컷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언제나 착하기만 한 제리가 아니라 종종 음흉해지는 제리가 있고, 그런 제리는 벌을 받는다. 혹은 톰과 제리가 합작해서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한다. 톰과 제리는 할리우드 고전 코미디 영화의 전형이랄 수 있는 슬랩 스틱과 스크루볼(톰과 제리의 우정은 종종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 같다는 점에서) 코미디를 만화로 절묘하게 옮겨온 것이 성공의 배경이다.

아모스는 생쥐다. 그러나 제리 같은 생쥐는 아니다. 아모스는 제리보다 진지하고, 무엇보다 바다를 사랑하는 생쥐다. 아모스는 뭍에서 태어나 뭍에서 살았지만 바다를 동경했고, 어느날 우연히 바다에 나갔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 곤경에 처하고 만다. 뭍에서 태어난 뭍에서 자란 생쥐, 아모스의 이야기는 마치 부모의 품을 갓 떠나 좀더좀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과 흡사하다.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치원으로, 초등학교로, 사회로 점점더 넓고 각박한 세상으로 나간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도 언젠간 자식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다. "아모스와 보리스"는 어린이들에게 이별의 의미, 우정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리고 사랑도...

종종 우리네 어린이문학 책들을 읽다보면 천편일률적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아동문학평론가 원종찬은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에서 우리 아동문학엔 "쿠오레주의"에 비해 "피노키오주의"가 부족하단 말을 하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문학에는 해방과 교화의 기능이 있다. 해방이라 함은 거칠게 말해 "카타르시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교화란 일종의 간접체험(교육)을 의미하는 말인데, 우리 어린이문학이 많이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동문학에서 "피노키오주의"는 여전히 결핍상태이다. 혹여라도 그런 판타지를 다룬 아동문학작품들도 뭔가 사유의 뿌리가 없이 수경재배된 식물성 이미지를 지닌다. 식물성 느낌을 주는 건 교화를 주어야한다는 강박과 현실에 뿌리박은 동화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의지가 결합되어 생긴 가장 안좋은 경우를 의미한다. 톰과 제리, 아모스와 보리스는 모두 의인화된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 자체가 일종의 우화적 판타지라 할 수 있다. ("톰과 제리"의 경우엔 약간의 이견이 있겠지만 긍정적인 부분에만 집중해 말하자면 재미라는 측면에서 다소 비교육적일 수 있는 요소들 혹은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사실 낯선 판타지의 세계는 절대 아니다. 도리어 이 이야기는 매우 낯익다. 힘은 없지만 항해를 꿈꾼 생쥐 아모스는 겁도 없이 바다로 나간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 파선되고 넓디넓은 바다를 떠다니게 된다. 그런 아모스를 구한 것은 바다에서 아니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생물인 고래 보리스이다. 아무의 도움도 필요없을 것 같은 보리스도 어느날 바다로부터 밀려나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그런 보리스를 발견한 아모스는 친구 코끼리들을 불러 보리스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이것이 이 야기의 전체적인 얼개이다. 낯설기는 커녕 너무 낯익어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았는지 도리어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다.

기실 아동문학시장의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질좋은 창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저런 전래 동화 혹은 국적 불명의 세계 민속 동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위인전들이 난립해 있다. 게다가 워낙 소문에 눈 어둡고, 귀 얇은 유행이다 보니 한 번 입소문을 타고 번진 아동도서들은 불티나게 팔린다. 모모 출판사는 원래 한 번도 아동문학이나 그와 관련된 책을 출간한 적이 없음에도 흥행 대박의 결과로 빌딩을 올리네, 원작자와 저작권료 지급 문제로 송사에 걸리더니 원래의 기획을 살려 새로운 시리즈를 기획 출판하면서 중국에 진출한다고 한다. 저작권협약이 본격적으로 발효되면서 괜찮은 작가들의 작품을 서로 판형만 달리해서 중복 출간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대신에 저작권 시효가 만료된 작품들이나 애초부터 저작권을 따지기 어려운 전래 동화류들이 난립한다.

그런 중에 이 작품 "아모스와 보리스"는 낯익은 이야기를 어떻게 낯설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란 생각이 들었다. 도움받고 은혜갚는 동물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소재이고, 그러다보니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류의 교훈을 다룬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아모스와 보리스"를 변별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는 아모스의 진지함이다. "아모스와 보리스"의 두 주인공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본 경험이 있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이 둘의 결말은 "그리하여 아모스와 보리스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했더래요"가 아니다. 이 둘의 우정은 서로의 목숨을 구할 만큼 진한 것이지만, 정작 이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바다와 육지라는 두 존재가 누리는 삶의 토대가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이 둘의 결말이 이별이란 점에서 이 둘의 결말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접하게 되는 가장 강렬한 이별은 무엇일까? 졸업과 입학, 전학, 이사, 이민, 실연, 이혼... 여러 종류의 이별이 있지만 가장 확실하고 가장 오랜 이별은 죽음이다. 바다와 육지라는 삶의 토대를 떠나선 살 수 없는 두 생물의 이별은 각각의 생물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해진다. 이 둘의 이별은, 이별과 죽음에 대해 이승과 저승에 대해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린이들 마음에 무언가를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의 목숨을 구명할 만큼 친한 사이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물론 순진한 아이들은 아모스가 바닷가에 살고, 보리스는 그 해안가에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순진한 아이들도 자라서 언젠가는 이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어리고 순진한 존재들의 가슴에 이별과 죽음이란 성인이 되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극복할 씨앗 하나를 몰래 숨겨둔다.

그리워 하는 동안 당신들은 정말 헤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듯 말이다. 낯익은 이야기를 어떻게 낯설게 할 것인가? 문학양식에 있어 전형을 반복하는 것을 우리는 신파라고 부른다. 이야기가 신파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전형이 아닌 이야기의 원형질에 접근해야 하고, 그 원형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그것이 낯익은 이야기에서 낯선 감동을 끌어내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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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대전복수동정지윤 >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도 있는데...
사랑에 빠진 개구리 -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4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4
맥스 벨트하우스 지음, 이명희 옮김 / 마루벌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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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면 예뻐지고, 세상 모든 유행가 가사가 내 마음 같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사랑에 빠진 개구리는 몸 속에서 무엇인가 콩,콩 뛰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픈지 기쁜지도 알 수 없다. 개구리의 증상을 들은 토끼가 너는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병명을 진단해 줄 때까지 개구리는 사랑에 빠진 줄도 모르고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토끼의 말을 듣고야 누구를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더니 하양 오리란다. 사랑을 얻기 위해 개구리는 점프하는 연습을 하고 예쁜 그림을 그려 보내는 노력을 한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결국 오리는 개구리의 마음을 받아 준다. 서로 달라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결말을 맺으며...

인종이나 종교, 국적, 빈부를 초월해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개구리가 오리를 사랑하면 생태계가 파괴된다. 개구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연못에 사는 다른 개구리였다면 더 좋았을 뻔 했다. TV 만화의 개구리 왕눈이처럼 빈부,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사랑을 이룰 수 있었더라면... 내가 너무 메마른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이 개구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나는 아이에게 항상 말한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 두가지가 있다고 첫째는 돈이고, 둘째는 사랑이라고 말이다. 돈이 사람을 따르는 것이지,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돈을 따를 수는 없다고 말이다.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기 보다는 나에게 맞는 사랑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인종,종교,국적을 극복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이성간의 사랑에도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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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eruen > <마당을 나온 암탉>
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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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는 동안 희망찬 동심의 나라와 마주한다기보다 오히려 삶의 희로애락과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의 동화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나는 특히 여성 주의적 관점에서 이 동화에 드러난 여성의 삶을 살펴보고 작가가 그린 여성상이 가져 올 부정적인 효과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책에 등장하는 마당 식구들은 크게 닭과 집오리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무리를 통제하는 캐릭터는 언제나 ‘수컷’이라는 것이다. 즉 마당을 지키고 무리를 통솔하는 위엄 있고 능동적인 주체는 언제나 남성이다. 남성이 안팎으로 자주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반면 남성의 삶에 속한 채 순종하면서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는 주체는 어김없이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젠더 전형화는 상대적으로 열린 사고를 기대해 볼 수 있는 동화에서조차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잎싹이 알을 품는 동안 수컷 청둥오리가 지속적으로 먹이를 물어다 주는 행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결국 남성은 어떤 식으로든 경제적인 부양의 책임이 있으며 더 나아가 조직을 통솔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지닌 고임금 적용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여성은 일차적으로는 가정의 영역에서 출산과 양육, 남편의 내조에 헌신하고 이차적으로는 직장 영역에서 산업 예비군의 형태로 남성을 보조하는 저임금 적용 대상이라는 식의 젠더 전형성을 독자로 하여금 내면화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새끼를 키우는 잎싹의 삶만 보더라도 전형적인 어머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이 대목에는 모성애라는 중요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그에게 자신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집중시키는 주인공의 삶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지나치게 자식의 삶에 종속된 여성의 삶만이 가치 있는 것처럼 일반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의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젠더 전형성의 강화는 이야기의 결말과도 맞닿아 있다. 족제비로부터 자식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도 처절하게 대항하던 잎싹은 자식과의 이별 앞에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상실한다. 결국 잎싹이 자신을 족제비의 먹이로 자처하는 결말은 이 동화가 여성에게 행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이런 결말은 남편 혹은 자식이 없으면 여성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여성으로서의 잎싹의 삶이 얼마나 의존적이고 수동적이었나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현모양처의 미덕을 강요하는 억압과 폭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비극적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작가는 모성애, 희생과 사랑의 고귀함 등을 독자에게 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젠더 전형성을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했던 독자에게는 그것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아직 젠더 전형성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자에게는 그것을 내면화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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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늙고 못생긴, 그러나...
내 친구 커트니 비룡소의 그림동화 29
존 버닝햄 글.그림, 고승희 옮김 / 비룡소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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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 없는 글과 여백을 많이 두는 그림 속에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담고 있는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그래서 아이보다 내가 더 좋아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의 과감히 생략한 듯한 처리와 여운이, 책장을 덮고 몇날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또한 숨기고 싶은 듯 마지막에 살짝 그려놓은 그림이 뭔가를 강하게 말하고 있다.

늘 그렇듯 기대와 호기심으로 이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펼쳤다. 그런데 시종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개가 아니라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특히 두 분 할머니들이었다. 젊었을 적의 꽤 아름다웠을 미모는 예순 중반을 접어들면서 눈에 띄게 변해가고 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놀아주는 걸 아주 좋아한다. 할머니만 보면 뭔가 놀이방식을 들이밀며 놀자고 조른다. 젊은 엄마는 뭐다뭐다 핑계를 대고 잘 놀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는 할머니는 요술장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할머니 손을 거치면 뭐든 뚝딱뚝딱 신기한 게 만들어지고 아이가 원하는 걸 잘도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안 데려가는' 늙고 지저분한 똥개가 떠돌이 개가 된 것은, 아마도 젊은 부부들이 집에 함께 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커트니가 어느 날 끌고 들어온 여행가방에 적힌 세계 곳곳의 도시 이름과 새로운 집에서 식구들이랑 같이 지내면서도 갖가지 집안 일과 아이돌보기까지 하는 모습이 내 맘을 편하게 하지 않았다.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젊은 부부의 눈치를 살피며 집안 일을 하고 아이까지 키운다. 우리 아파트 공원에는 이른 아침이면 할머니들이 나오셔서 정답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을 매일 볼 수 있다. 커트니가 공원에 나가서 다른 개들을 만나기도 하는 모습이 그 고요한 풍경과 닮았다.

우리도 세월이 더 가면 늙어가겠지. 손자손녀들에게라면 끔벅하시는 네분 할머니 할아버지. 깨끗하고 예쁘고 편리한 것만 찾는 젊은 엄마아빠. 내 아이들과 내 집이 제일 소중하듯 그 뿌리를 잊지 말아야겠다. 결국 우리를 이만큼 자라게 한 건 그 분들이 실어주신 정신적인 힘이라 생각된다. 조용히 자식들을 위해 늘 기도하시고 어려울 때면 용기와 지혜를 주시는 분들이다.

'개를 잃어버렸어요. 우리 커트니는요, 나이가 아주 많고요, 눈썹도 굉장히 진해요. 바이올린도 켤 줄 알고요, 저녁밥도 진짜 맛있게 지을 수 있어요. 또, 마술놀이를 하면서 아기랑 놀아 주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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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윤자매맘 >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구요
내 사랑 뿌뿌 비룡소의 그림동화 36
케빈 헹크스 글 그림, 이경혜 옮김 / 비룡소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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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갑필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는 엄마를 일주일을 졸라 결국은 지갑필통을 샀습니다. 물론 그 사이 나의 비닐 자석 필통을 칼로 조금 찢어 놓는 만행(?)을 비밀리에 진행시키는 노력이 있긴 했지만요.어쨌든 그렇게 갖게 된 헝겊으로 된 지갑필통은 더없는 저의 보물이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책상에서 떨어져도 소리하나 내지 않아 선생님의 싫은 표정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뭐랄까... 괜히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서른이 된 지금도 그 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마다 그 필통에 시험 볼 때 쓸 필기구를 넣어갑니다. 그 필통에 대한 지독한 애착은 이미 하나의 징크스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이십년 가까이 굴러온 필통은 촌스럽기 그지 없고 솔직히 이제 정말 버릴때가 싶으면서도 그동안의 추억들과 이야기들이 묻어있기에 쉽사리 포기가 되지 않더군요.

내 사랑 뿌뿌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귀여운 생쥐 오엔에게는 어린 아가때부터 함께 해 온 노랗고 보드라운 담요 뿌뿌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는 오웬이 어릴 적 덮었던 담요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이 싫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뿌뿌를 버리려고 하지만 오웬의 뿌뿌를 향한 애착과 집착은 좀처럼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부모님의 오웬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렸을 까요? 그것은 바로 오웬을 이해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오웬에게서 무조건 뿌뿌를 빼앗으려 하지 않고 자르고 자르고 재봉틀로 박고 해서 오웬이 늘 들고 다닐 수 있는 손수건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오웬은 어딜 가든지 뿌뿌와 함께 입니다. 이제 오웬의 부모님은 늘 담요를 끌고 다니는 오웬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글을 읽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우리는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그것이 다소 우리가 세워 놓은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싹뚝 잘라버리고 가위질해서 모양을 내는 건 아닌지. 가끔 우리는 아이들이 소중해 하는 것들을.....그것이 다소 하찮고 보잘것 없어 보인다고 해서 함부로 단정지어버리는 건 아닌지. 앞으로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겠습니다.

무조건 “안돼.하지마.”를 무섭게 내뱉는 엄마,혹은 선생님 대신 조그만 아이들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고 아이들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리하여 나의 기준들과 아이들의 이야기 사이에서 적절한 평형을 유지하는 것,,,,정말 노력해야겠지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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