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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그림 - 그림 속 속살에 매혹되다
유경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9월
평점 :
아직도 그림이야말로 내겐 가장 완벽한 환상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다. 환상은 어쩔 수 없이 허무한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희미한 힘인 동시에 막강한 희망이다.
그중에서도 나쁜 그림은 훨씬 더 가혹하게 나를 유혹한다.
아름다운 그림, 화사한 그림, 만만한 그림보다도 치열한 그림, 치명적인 그림, 획책하는 그림이 나를 자극하고 매료한다.
마음과 정신의 표피만을 건드리는 그림도 훌륭하다. 세상에는 그 정도까지도 가지 못하는 그림이 부지기수다.
나는 내 깊은 무의식과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그림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만남을 투셰touche 혹은 푼크툼punctum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를 위해 준비된 그림이고 또 다른 나, 즉 분신인 것이다.
여기 본 책자에 소개하는 그림은 일상생활에서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사실 혹은 진실에 관한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숨김과 드러냄, 감춤과 폭로 사이에 있다.
그림이라는 예술이 진실 혹은 진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볼 때 그것은 은폐와 탈은폐의 변주로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그림들을 섹슈얼하고 에로틱하고 관음적이고 탈주적이다.
이 책에는 최초의 창녀 프리네, 여자 색정광인 님프들,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았지만 쿨하게 보내주는 칼립소, 엄마의 욕망을 벤치마킹한 살로메, 남편 대신 아이를 죽여 치명적인 복수극의 종지부를 찍은 메데이아, 남자보다 동물을 더 꿈직하게 사랑한 귀족 여성, 어린아이로 퇴행해 남자를 유혹하는 롤리타, 능수능란한 늙은 세이렌, 상대를 유혹하고는 차갑게 돌변하는 인어, 처녀 같은 유방을 보여주려 하는 성모마리아 등 마치 죄를 범한 듯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한편 이런 여자들 때문에 고통받았던 거이스토커 폴리페모스, 훔쳐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죄로 눈이 먼 재단사 톰, 자신을 짝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자웅동체가 된 헤르마프로디토스, 나르시시즘에 빠진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등 나쁜 여자들에 의해 절망적인처지에 놓인 남자들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나는 그림이 보여주는 이러한 완벽한 속임수와 일탈이 좋다.
그것은 그림이 날 사유하게 한다는 뜻이고 싱싱하게 살아 있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미학적 윤리다. 미에 현혹되지 않는 자는 멋지다. 그렇지만 늘 미에 현혹당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자들이야말로 사랑스럽다.
나는 휼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사랑 받는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사랑하게 만든다.
그림은 내가 불완전해도 괜찮다고 나를 위로한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말해준다. 그림은 항상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모든 그림은 대상 없어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최음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