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
고든 마리노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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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크기로 보면 한없이 작은, 마치 없는 존재와 같은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는 종교의 역할이 컸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현생의 선행을 강조한다. 불교는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열반하는 게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근대 철학으로 넘어와서는 인간의 의미를 이성으로 규정한다. 데카르트는 합리적 의심을 통해 존재하는 나를 증명했다. 칸트는 자기 자신의 도덕 준칙을 만들어 그에 따르는 것이 인간의 덕성이라고 강조한다. 실존주의 철학은 근대 철학의 이성을 넘어 감성에 접근한다. 합리적 판단보다 존재하는 나의 상태에 집중하는 게 실존주의 철학의 근간이다.

 

 

이 책은 실존주의의 시작을 알렸다고 볼 수 있는 키르케고르를 중점으로 실존주의 전반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이전에 읽은 키르케고르의 서적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을 때의 난해함이 이 책에서 느껴지지는 않는다. 저자 자체의 개인적 삶을 토대로 풀이했기에 이해가 쉽게 되는 편이다.

 

 

키르케고르 철학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절망이다. 대게 절망은 부정적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느끼는 우울과 절망은 나를 망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키르케고르는 다르게 보았다. 절망은 내가 원하는 상태가 되지 못한 자신을 보고 좌절한 것이라 말한다. 쉽게 말해 난 연예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크지만 지망생으로 계속 머물고 있을 때 절망하게 된다.

 

 

키르케고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계다.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자아라고 말한다. 삶에서 생기는 고통은 결국 관계의 어긋남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한다. 저자와 키르케고르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합리적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게 신앙이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생각난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 죽은 자들은 모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따르면 실존의 원동력이 살아가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허구의 산물을 믿을 수 있는 인지 혁명을 통해 사회를 구성했다고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인지 혁명이 삶의 의미랑 연관된다. 확실한 참이라 말할 수 없어도,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게 우리 뇌에 있고 그 자체가 삶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신앙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 뇌는 그것을 믿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실존주의란 말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필자 역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난해함을 생각하면 거리를 두고 싶을 정도이다.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는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자기계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난해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저자 자신의 삶으로 해설해 이해가 쉽다. 다만 실존주의 자체가 난해한 철학이기에 일독으로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울 수 있다. 천천히 여러 번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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