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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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매사에 합리적이고 지적일 거라 여긴다. 르네상스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던 이성이 우리에게 남겨준 게 많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세상의 법칙은 신성으로 설명되었지만, 근대에 들어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성이란 도구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산업혁명을 이끈 과학적 사고의 바탕이 되었고 데카르트, 칸트, 루소 등 계몽주의 철학의 가장 큰 조력자가 되었다. 합리적 사고를 중요시한 이성은 과학, 경제,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영향을 키웠고, 이제는 이성적인 것을 추종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성으로 만들어진 풍족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푸코는 근대적 이성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해 불합리한 상황을 만든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현대 정신과학에서 말하는 정신병은 과거에는 병으로 여기지 않은 세세한 부분마저도 질병으로 취급한다. 이는 이성적 사고로 만들어진 과학이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데 일조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정신병으로 분류되면서 질병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전기, 약물치료나 격리 등의 방법은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정상으로 만들려던 근대적 이성의 끔찍한 행동이었다(현대에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라고 판별이 되었다). 근대적인 이성에 내면화된 현대인은 문제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힘들다. 그 때문에 이성적 사고로 자행된 수많은 사건에 개인은 의구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각자가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자기비판이 있을 때야만 비로소 근대적 이성의 허울을 벗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푸코와는 생각을 달리했다. 그는 이성의 발현으로 공론장을 들었다. 과거 살롱에서 시작된 토론의 문화가 공론장을 성장시켰고 이것이 곧 이성의 발전을 증폭시켰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근대의 문제가 이성의 광기 때문이 아니라 소통의 이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 말처럼 현대의 사람은 실질적인 상호소통이 부재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SNS는 쌍방향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내 주장 발현하기로 변질하여있으며, 친구들끼리의 토론은 어느새 비난만 가득한 감정싸움으로 돌변한다. 하버마스가 말한 집회나 시위, 토론 모임 같은 공론장이 점차 보기 힘들어진 현대는 감정만 남아있는 짐승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 같다.

 

이성의 발현에 대해 상반된 의견을 가진 푸코와 하버마스의 진단을 곰곰이 씹어보게 되었다. 두 석학의 주장은 어느 쪽에 관심이 갈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지식인 마을 시리즈가 좋은 점은 상반된 주장을 언급함으로써 독자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사유를 그대로 흡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의 사유를 한 단계 높아진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에 가까워질 것이며 이성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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