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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약자로서의 정체성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중첩된다. 장애인의 경우 신체적 약자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권력적 약자이기도 하다. 또 어떤 경우에는 다수 집단과 소수자 집단에 걸쳐 있는 경우도 많다. 투자 은행에서 몇 억대의 연봉을 받으면서 서울 도심에서 럭셔리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게이 남성의 경우가 그러하다.
… 누구든 여러 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무거운 정체성이 자신이 사회적 강자인지 아니면 약자인지를 결정하게 한다. - 125 ~ 126pp
중립적인 글을 읽고 싶다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진짜 보수, 가짜 보수>를 쓴 송희영 주필의 글을 읽었을 때, 그리고 종종 한겨레 기자나 그쪽 계열의 지식인들이 쓴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이념이란 중력에서 쉽게 빠져나오기가 수비지 않다. 자신의 이념에 대한 보수성. 그것은 진보든 보수든 모두 있었다. 그리고 해당 지식인들은 과거 현재의 사회 형상들을 언제나 그들의 편향에 맞게 조리 있는 상품을 내 놓는다.
그들의 글을 읽는 것은 하나도 불편하지 않는다. 명확하게 적과 아군이 나뉜 상황에서 자기 분열은 일어나지 않는다. 적이 쓴 글을 보고서는 “아 적은 이렇게 생각하는 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아군이 쓴 글을 보고서는 “이것이 바로 내가 무기로 사용해야 할 지식이군!”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글에서는 지식은 있어도 지혜는 없다. 물론 성찰도 없다. 언제나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 할 뿐이다.
오늘 김지윤 씩의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책을 하루만에 완독했다. 솔직히 하루만에 이렇게 가뿐하게 책을 읽는 경험은 내 독서 역사에서 흔치 않는 일이다. 하지만 완독을 했다는 기쁨보다, 내가 드디어 분열했다는 점에도 왠지 모를 희열과 지혜을 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20년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인생의 책이다.
이분법 세계관의 해체
선인가 악인가. 우리의 세계는 선명하게 이분법적으로 갈라져 있다. 이분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분법은 어떠한 가치 분화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사회 변화의 과정에서 교조주의적인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하려는 사람들을 악으로, 그 반대에 위치한 사람들은 변화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악으로 몰아 넣는다. 물론,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신들은 선이다. 물론, 이들이 이와 같은 포션을 취하는 데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세상의 보든 정보를 입체적으로 체화할 수 있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안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지를 편향시키는 방향으로 정보를 소비한다. ‘맘충’의 경우는 자신의 아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몰지식한 엄마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들이 가게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손님들에게 피해를 끼쳐도 무조건 자기 아이를 보호하려는 사람들. 하지만 그것은 그 행동을 한 사람이 잘못이지 모든 엄마들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경계의 풍경들은 사라졌다. ‘맘충’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해당 사건의 한 부분만을, 반대로 ‘맘충’은 만들어진 것이고 있지도 않다고 하는 사람들은 상대편을 욕하기만 한다.
김지윤의 책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는 이런 복잡한 세상사의 중간을 비춘다. 어쩌면 이 ‘중간’이란 말도 다소 애매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내 인식론 안에서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인 중립 혹은 중간과 같은 다소 모호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다만, 얄팍한 지식을 통해서 양비론을 펼치고, 지산은 중간에 있다고 포지션을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인생이란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입체적인지를 혹은, 선명하게 이분법적이기보다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나 내게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미국 야구에서 흑인 야구 선수들이 사라진 이야기들이었다. 다른 스포츠와 다르게 갖가지 도구가 필요한 스포츠, 단순히 도구만이 아니라 적당한 사회의 커뮤니티에 속해야 할 수 있는 스포츠, 그것이 야구라고 김 씨는 이야기 했고, 점점 양극화가 진행되는 미국에서 흑인들은 ‘스포츠’라는 어쩌면 단순한 놀이조차도 구조적으로 참가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음을 김 씨는 이야기 해 주었다. 단순히 불평등이나 차별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김 씨가 이야기 하는 방법은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자료 활용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유동적으로 문제들이 발생하는지를 이처럼 야구의 사례처럼 보여주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언급한 유리 천장이나 임금 차별은, 여성을 고위직에 뽑지 않는다는 직접적인 원인보다 노동 시장의 구조적 임금 격차로 인한 것이 크다. 그리고 이것은 간접적이지만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관리직과 낮은 직급의 사무직, 나아가 비정규직 간의 임금 차이는 남녀 간의 불균형한 직업군 분포도에서 출발해 남녀 임금 격차로 귀결된다.
… 단순히 남녀 차별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다. 노동 시장의 불평등과 여성의 경력 단절, 그리고 사회에 내재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47 ~ 49pp
또한 재미있었던 부분은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마, 현재 우리 사회의 젠더갈등에서 ‘후미에’가 돼버린 것을 고르라고 하면 <82년생 김지영>이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책을 읽고 영화를 봤는데, 어떻게 보면 김지영 씨가 겪는 고통의 근본적 문제는 어쩌면 여성이란 약자의 신분이 상쇄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사회 구조와 맞물려서 그러한 것들아 강화된 것이 적지 않았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1‧2차 노동시장간 간극이 현재와 같이 크지 않다면 책 속에 김지영 씨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을까? 만약 우리의 노동 환경에 남성에게든 여성에게든 임신휴가를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더라면, 영화와 같은 비극이 만들어 졌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김지윤 씨가 이를 잘 짚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첨언을 붙이자면, 어떻게 보면 여성들 안에서도 2016년도에 이대의 미래라이프 대학 사건을 중심으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여성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학생들은 평소에는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던 대학의 가지를 두고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졸업장의 값어치가 떨어질까봐 ‘졸업장’으로 시위를 한 바도 있다. 어떻게 보면 김지윤 씨가 앞에서 이야기 했던 노동시장이란 거대한 문제는 내버려 둔채 남녀든 혹은 여여든 혹은 남남이든 모두 상대적으로 기득권이 되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82년생 김지영>의 문제가 젠더갈등이 아닌 노동시장의 갈등, 이대 문제 또한 대학의 가치가 아닌 대한이란 존재와 학력의 문제로 됐다면 보다 큰 차원에서 우리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혹은 자기만의 권리를 확장하겠다는 우리 개개인 혹은 집단 이기심이란 이름의 중력은 이와 같은 프레임의 전환을 용납하지 않는 듯 하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듯이. 끝없이 과거 속으로 물러나면서.” - 250 ~ 251pp
그리고 김지윤 씨 또한 단순히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기득권의 문제와, 성소수자 문제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몇몇의 테러 사건들을 통해서 이를 더 보여주고 있다.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가 말하고 싶은 것은?
… 씁쓸한 이야기이다. 여성 운동이 폭넓은 공감대와 당위성을 갖는 것은 사회에서 여성이 가진 소수자적 위치 때문이다. 물리적 숫자로야 이 세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소수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에 사회적 소수자인 것이다. … 여성 운동은 기득권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권리 확장의 문제보다 시급한 것은 기본적 인권 보장과 확보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은 둘 중 어느 것인가? - 37 ~ 40pp
원래 차별은 취약 계층에게 더 잔혹하게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많은 진보 단체와 학자들이 유리 천장을 외치며 이를 깨뜨리는 이들에게 환호하는데, 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훨씬 더 심각한 여성 차별에 대해서는 얼마나 주목하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불만이다.
이 사회는 성공에 핀 조명을 맞추고 이를 몇 백배 빛나는 스토리로 만든다. 왜 그러나고? 알파걸의 성공은 화려한 승전으로 남지만, 취약 계층 여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은 여봐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눈부신 기록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 여성이든 남성이든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기득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득권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 나는 이미 기득권 구조에 속해 있는 여성이다. 그리고 나의 기득권의 정체성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압도한다.
그래서 여성 단체나 여성학자, 여성 운동가들이, 대기업 여성CEO 비율이니 여성 국회의원 비율 등과 같은 기득권에서의 평등보다 취약 계층에서의 평등을 더 목소리 높여 이야기했으며 좋겠다. 그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것이 솔직히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목소리는 아닌가 하는 못된 의구심도 든다.
… 하지만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차별과 성희롱으로 인해 마트 장고에서 눈물 흘리는 여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던가. - 50 ~ 53pp
몇몇 알파걸들의 유리 천장 깨기가 아니라 수많은 봉순이 언니들이 함께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70pp
글쓴이 김지윤 씨는 지독할 정도로 현실주의자다. 주변에 사회과학을 공부한 친구들을 보면 겉멋만 든 현실주의자들이 꾀 있다. 사회에서 사건 하나가 터지면 그들은 끊임없이 사회는 퇴보밖에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얼추 자신의 생각과 맞는 사회가 퇴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거 봐. 내가 전에 말했잖아. 그들은 그래서 안된다고”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에 기스를 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회에 대하여 기대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서 퇴보가 일어나면 이를 긍정하고, 이를 통해 심리적 보상을 받는 것이다. 대학생들 혹은 사회인들 중에서도 사회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중2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의 저자 김지윤 씨가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은 그들과는 조금 다르다. 책에는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김지윤 씨는 비판적으로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가장 다른 점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 정확한 비판이지 않을까. 일부러 모호한 비판을 통해 해석의 여지를 많이 열어놓는 비판과는 달리, 비판의 지점이 언제나 정확하고 입체적이다. 단순히 어떤 한 주체를 악으로 만들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 여러 근거를 모은 게 아닌, 자신의 삶이란 텍스트를 통해서 풍부하게 그 비판거리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지윤 씨의 비판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 스스로가 악을 만들었던 행위 혹은 무관심에 대해서도 조명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이 무엇보다 신뢰가 가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의 지지층을 선택해서 쓴 게 아니라, 김지윤 씨가 정말 사회에서 가장 핍박받는 사람들. 사회의 잔인성을 온몸을 통해서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쓰고 있다는 모습이 그녀의 경험을 통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층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여성 노동자들. 사회경제적 자본을 획득하지 못한 성소수자들.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한 사회의 핍박을 받고 있을 사람들을 위한 직석을 김지윤 씨는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있다. 어쩌면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란 이 책의 제목은 이기적이어 보이는 게 아니라,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관점이 잘 녹아져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외 이 책의 주옥같은 말들...
<자율 의지에 관한 이야기>
장애인들은 이전까지 ‘핸디캡handicapped’이라 불렸다. 스스로에 대한 권한을 찾아가면서 이들은 자신을 ‘핸디캡’이 아닌 ‘디스에이블드disabled’로 부를 것을 요구한다. 마치 모자를 들고 구걸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혹은 이와는 반대로 더 뛰어난 말에게 붙여진 형벌이라는 의식적으로 미화한 이미지도 아닌, 매우 직설적이고 무미건조한 말이 ‘디스에이블드’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으로 읽혔다. - 98pp
<개인적인 체험과 공공의 책임>
국가와 사회는 소수자의 권리를 나서서 먼저 보호해 주지 않는다.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다양성이란 골치 아프기만 한 것이다. 우생학이 저명한 정치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효율적으로 사회를 컨트롤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우수한 사람들이 생산적으로 알차고 똘똘하게 문제없이 살아가 주는 것만큼 국가에게 좋은 것이 없다. 평균에서 멀리 덜어져 있는 사람들을 챙겨 가며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다.
결국 소수자의 권리는 소수자가 챙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절박학 상황에 이르게 되면 소수자들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고, 쑤자 그룹 밖에 있는 사회 주류의 일부가 주목하게 되면서 국가에게 이들을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라며 함께 투쟁한다. 그렇게 배려의 움직임은 제도화가 되면서 사회는 바뀐 제도에 적응하고, 세상은 변해 가는 것이다. - 100 ~ 101pp
<현실은 그렇다>
내가 좋고 싫음의 선호도가 다른 이의 삶을 이등 시민이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건 인권 침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 안타깝지만 한국의 성 소수자들에게도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지난하고 아마도 모멸감까지 감수해야 하는 투쟁이 요구될 것이다. 퀴어 퍼레이드에서 집단적 소속감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외치는 것 이상의, 인격적 모독 혹은 그 이상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제도적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상처뿐인 과정이 기다릴 수 있다. 미국도 1960년대 스톤월 항쟁을 필두로 수많은 시위와 저항이 있었다. - 118 ~ 119pp
<소수자로 산다는 것>
<민족 국가의 탄생>
사실 ‘민족주의’와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계에서 ‘민족’은 ‘민족주의’가 탄생시킨 개념이고, ‘민족주의’는 근대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편이다. 절대 왕조의 새다가 끝나고 국민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 주던 종교의 힘마저 쇠퇴한 근대 시민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민족이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 160 ~ 161pp
<낯선 이와의 공동체>
산타바바라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의 한 실험 결과는 전하는 바가 크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우리’와 ‘남’을 구분하는 데에 매우 익숙하다. 이 중 인종은 나와 상대를 구분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흑인과 배인의 사진을 피험자에게 보여 주었을 때, 피험자는 이들을 인종으로 먼저 구분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인종의 사진과 더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사진 속의 인물들에게 유니폼을 입혔을 때이다. 그런 경우, 인종적 구분은 큰 폭으로 감소한다. 즉, 일정한 유니폼을 입게 되면, 이전까지 작용했던 인종의 안테나는 상당히 힘을 잃는다. 사람들은 인종이 아니라 유니폼으로 사진 속의 사람들을 분류하기 시작한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는 인간의 본능을 억제할 수는 없지만, 이 본능은 꼭 인종이나 혈연일 필요는 없다. 나와 한 집단에 속한다는 애착심은 충분히 다른 매개체를 통해 발전할 수 있고, 사회화 과정은 피부 색깔이나 성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우리’와 ‘그들’을 한 집단 내에 융화시킬 수 있다.
공동체는 배타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비이성적인 기준에 기대면 기댈수록 배타성은 더욱 강조되고, 그 배타성이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만든다. 그리고 인간이 구분 짓기를 본능적으로 좋아할지라도,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같은 집단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
그 과정에는 보편적 규율과 합리적 법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국가 혹은 사회라는 같은 지역 내의 구성원을 보편적 규율과 합리적 법체제를 통해 묶을 수 있다면, 다른 국가 혹은 사회 집단과도 이를 통해 연계할 수 있지 않을까?
보편적 규율과 합리적 법체제가 작용하는 사회는 ‘시스템’이 일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는 몇 안 되는 정치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회 구성원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법과 규율이 작용한다는 믿음, 그것이 사회가 건강하게 굴러가는 데에 기여한다. 2000년대 에볼라가 아프리카 지역에 창궐했을 당시, 확산을 막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장애물은 의료 시절의 미비가 아니었다. 특정 지역의 병에 걸린 아프리카인들이 정부가 만들어 놓은 보건소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두려워해서 방문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정부가 음모를 꾸몄을 것이라고 강하게 의심했고, 심지어 보건소 직원과 의료진에 협박을 가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규율과 법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믿음이 주민들 사이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배타성을 상쇄할 수 있는 보편적인 규율과 합리적 법체제, 이 두 가지가 갖춰진다면 지구가 거대한 제노바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꿈이라도 꿔 보고 싶다. - 187 ~ 188pp
<계급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
파리와 다마스커스에서의 테러로 인한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다른 것은 우리가 어떤 리그에 속해 있는가와 관련된 정체성의 문제다. 파리와 같은 리그인지, 아니면 아마스커스와 같은 리그인지. 그리고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이 리그간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나와 다른 리그에 소간 사람의 불행에 우리는 동정은 할 수 있지만 공감하기는 어렵다.
… 중요한 것은 이 공감대의 간극이다. 간극이 계속 벌어지면서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토대를 잃어 간다. 산업 제해로 젊은 청년이 화학 발전 공장에서 쓰러져 갈 때, 공장에서 일해 본 적 없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동정심 외에 다른 감정을 느꼈을까? 안타깝다는 인간적인 감정은 아무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 그 동정심은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기억 밖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극을 좁히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 세계가 ‘진보’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분쟁 지역에서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처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나는 오히려 ‘역사의 진보’라는 문구에 꽤 냉소적인 인간이다. 그럼에도 대책 없는 희망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가지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위대한 개츠비>의 한 구절을 읊어 본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듯이. 끝없이 과거 속으로 물러나면서.” - 250 ~ 251pp
<에필로그>
‘바이러스는 누구에게나 찾아간다’는 말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이, 바이러스에 돌출될 확률이 높은 사람들과 확률이 낮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 바이러스는 어디에나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사람들이 입고 있는 갑옷의 두께는 사회 경제적 위치에 따라 철저하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명 인사나 고위 관리나 감염병에 걸렸다는 뉴스에 충격을 받고, 그제야 바이러스의 가공할 전파력에 놀라워한다. - 253 ~ 255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