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과 예술
메를로 퐁티 지음 / 서광사 / 198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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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의 주저가 나와 있는 마당에 이 낡을 책을 굳이 읽어야 할까.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나온지도 한참 됐고, 번역의 질이 좋다고 할 수도 없다. 짐작컨대, 서울대 미학과에서 학부학생들이나 대학원생들이 윤독한 것을 오병남 선생이 정리한 것이 아닌가 싶은 혐의가 짙은 책이다. 메를로퐁티의 주옥 같은 논문들을 선정한 안목은 나쁘지 않다. 이 책에는 그의 생각을 잘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논문들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는, 메를로퐁티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눈과 마음"이란 아름다운 글이 실려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를 미학의 관점에서 접근해서인지 그가 선보였던 인식론의 전모를 살펴보는 데는 한계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프랑스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하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이기도 하다. 메를로퐁티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특히 현상학 전반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상학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데만 해도 적지 않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므로, 그 맥락을 짚으려 똥줄이 타게 애쓰는 동안 저도 모르게 지치고 풀죽어, 정작 본게임에서는 기진맥진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 그런 문제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역시 맨땅에 헤딩하기를 권하고 싶다. 무조건 구해서 읽어보고, 의문점을 하나하나 체크한 뒤에, 그것을 낱낱이 점검해나가는 차례를 밟는 것이, 요령이라면 요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상학과 예술>에 실려 있는 좋은 논문들은 일독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번역의 문제를 일단 접어두고, 대강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읽어두고 이미지를 잡으면, 추후에 보다 정리된 책들로 그 세계를 치밀하게 다잡아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어려운 것을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은 야박하게 말하면, 사기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난해한 것을 평이하게 풀어내는 대가가 있다면야 좋겠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메를로퐁티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책을 참조할 수 있는 환경이 일단 마련됐다는 점을 먼저 인식했으면 싶다. 현상학 일반에 관한 논의 접하려면 우선 한전숙 선생의 <현상학>(대우학술총서)를 읽어두는 것이 유리하다. 그 다음, <현상학적 운동>(이론과실천)이라는 2권짜짜리 개론서를 읽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메를로퐁티의 주저인 <지각의 현상학> 서문을 읽으면 현상학 일반에 관한 틀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조차 번거롭다면, 다시 강조하지만 "눈과 마음"을 무조건 읽는 것이다. 이 한편의 논문만으로도 그의 진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책들이 속속들이 번역되어 출판가에 떠돌고 있다. 그가 사르트르와 벌였던 이념논쟁을 정리한 책은 비교적 충실한 번역으로 만날 수 있다. <프랑스지식인과 한국전쟁>(민음사)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테러>(문학과지성사)는 그런 책들이다. 게다가 그의 유고집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도 얼마전에 번역되어 우리앞에 놓여 있다. 메를로퐁티의 매력에 흠뻑 취하고 싶은 사람은 "눈과 마음", "세잔의 회의" 같은 논문를 놓치지 말고 읽어보아야 한다.' ~야 한다'는 강압적인 언사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강조하고픈 마음에서 쓴 말이니 말이다. 메를로퐁티의 <행동의 구조>는 현재 조광제 선생이 번역 중이다. 생리학에 기반을 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세계가 국내독자들에게 그 전모를 드러낼 시기가 어서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메를로퐁티의 "눈과 마음"이 전공자들에 의해 맛깔스러운 문체로 다시 번역되는 날도 손꼽아본다. 자신의 철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설을 생각했을 만큼 메를로퐁티는 글쓰기의 맛을 아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예술작품에 관한 높은 식견을 소유하고 있었다. 가뭄에 단비같이 "눈과 마음"은 그의 그런 면모를 확인시켜줄 논문이다. 추억의 힘에 기대어 메를로퐁티의 "눈과 마음"에 관한 몇 줄의 견해를 적어보았다.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지는 후설 철학은 사실, 철학사의 오해에 불과하다. 그의 미발표 수고(후설 아카이브에 산재해 있는 원고더미) 속에서 후설은 초기부터  생활세계의 현상학에 관해 몰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숱하기 많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한 연구는 지금도 한창 진행중이다. 우리가 아는 후설은 아직 반쪽짜리인 것이다. 현상학이 화석화된 분과학문이 아니라 학계 전반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하나의 운동이며, 끊임없이 생성중인 학적 방법론이라는 사실을 다시 새길 필요가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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