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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 강의
왕리췬 지음, 홍순도.홍광훈 옮김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삼국지만큼이나 유명한 <초한지>, 혹은 고대 중국사를 탐독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항우와 유방 간의 중원 쟁탈전에 몹시 흥미를 가질 것이다. 가장 극적으로 역사적 주인공이 뒤바뀌어버린 그 몇 년 간의 스펙타클한 사건들과 개성 있고 영웅적인 등장 인물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만 년 중국 역사를 통틀어 봐도 이때처럼 다이나믹한 시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관해 우리가 정보원으로 쓸 수 있는 것으로는 고작 몇몇 역사소설들, 그리고 단편적인 사실이 간략하게 나열된 중국사 개론서 정도가 전부였다. 개인이 <사기> 같은 역사서를 직접 연구할 수도 없는 노릇일뿐더러 중국의 역사, 특히 고대의 어느 특정 시기를 집중해 다루는 대중 채널도 국내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간 <항우강의>는 철저한 고증에 기반한 팩트와 예리한 해석, 통찰, 평론을 통해 인물 항우와 항우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임으로써, 일반 독자와 마니아들의 이러한 정보 갈증을 해소하고 지적 만족을 더해주는 동시에 다각적이고 심오한 역사적 분석을 대중화하였다.
<항우강의>는 당대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시간적 흐름 배경 위에, 항우를 주인공 삼아 주요 인물들 간의 관계를 정치역학적으로 분석하고, 항우의 패인을 정치적/군사적/성격적 요소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 과정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물 분석에 있어서의 심층적이고 입체적인 접근과, 저자의 깊은 이해와 통찰이 드러나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다면적 평가 부분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책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항우의 포악한 성품과 중국 통일 성패와의 관계, 그의 휴머니즘적 행동들과의 관계를 분석한 부분이 돋보였다. 여기서 저자는 항우의 폭력이 그의 패망의 주요한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항우는 분명 진나라 병사 20만을 생매장했지만 그러한 잔혹함은 일전의 진시황이나 그와 자웅을 겨루던 유방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아가 저자는 항우의 폭력이 지닌 상황적 특수성을 밝히고 패망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한편 다른 주요한 실패 원인들, 이를테면 범증, 경포, 한신과 같은 인재를 잃게 만든 그의 독단적인 성격 등을 강조한다.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인물 항우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엿보이는 저자의 균형 잡힌 시각이다. 가능한 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드러난다. 사서에 기록된 항우의 언행으로부터 유추하여 그의 성격을 분석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그의 인품에 매우 비판적이나 일관된 논리와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어 전혀 과한 듯싶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미인과의 사랑과 그의 말년의 처지를 서술하는 파트에서는 따뜻한 시선으로 항우의 낭만적인 면모를 바라 본다. 항우가 자결하는 최후의 장면에 이르자 항우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항우와 유방을 비롯한 장량, 항백, 한신, 역이기, 종리매, 경포, 기타 수많은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의 정치역학적인 분석 시도일 것이다. 특히 사건의 분석과 비평 내용은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하는지, 역사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우려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있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항우는 전투에서 패배를 모르는 당대 최고의 군사혁명가이자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전략적, 정치적 접근 의식의 부재로 인해 제왕이 되기에는 모자란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감이 지나치고 주변 사람들을 신용하지 못하여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족한 면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서초패왕의 자리에서 추락하고 스스로의 목을 찌르는 지경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동일한 논리가 여러 문제에 반복적으로 적용되는 점도 일부 없지 않으나 대체로 납득할 만한 정도이다. 전체적으로 <항우강의>에서 보이는 저자의 논리는 비교적 정연하고 치우침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에 무리 없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초한의 역사는 삼국지와 마찬가지로 읽을 때마다 매번 느끼는 바가 다르다.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와 그들의 욕망과 의지를 이해하는 수준이 거듭할수록 깊어지기 때문이다.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훌륭한 참고서인 <항우강의>를 읽음으로써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요구되는 회독수가 비약적으로 줄어들 것이라 확신한다. 초한의 역사에 해박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항우강의>는 충분히 흥미롭고 읽을 가치가 있는 역사 비평서이며, 대중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중국 고대사의 재미에 빠져들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