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아, 그 역사와 문화 역사 명저 시리즈 2
스탠리 월퍼트 지음, 이창식 신현승 옮김 / 가람기획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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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400 페이지도 않되는 역사책이라는 선입관에 쉽게 생각하고 책을 들었다. 하지만, 역시 세계적인 인도사의 석학인 스탠리의 책은 그 첫 장부터가 달랐다.


인도의 강, 열, 몬순, 산을 통해서 물 흐르듯이 써 내려간 인도 지역적 특성의 개략적인 설명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으며, 특히, 인도의 생명줄과도 같은 몬순(6-9월 사이에 인도에 불어오는 우기)의 항로를 따라 펼쳐지는 자연의 위대함은 나의 숨을 멎게 했다.


인도의 역사는 신화의 역사이다. 지금까지도 인도인의 정신에 고스란히 스며있는 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그 신화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빛내고, 그리스 신들의 마지막 전쟁인 트로이 전쟁이 있었던 기원전 1000년 무렵, 인도의 모든 신화를 간직한 인더스강 유역의 선주민을 북방의 아리아인이 침범하면서 인도의 장엄한 역사는 시작된다.


그 후, 수세기가 흐르고 알렉산더 대왕이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인더스 강을 건너면서 제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게 된 어린 찬드라 굽타는 중국 초대 통일 왕조인 진나라가 일어나기 1세기 전, 기원전 324년에 마침내 처음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를 탄생시킨다. 또한 인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진시황제가 중국 대륙을 분서갱유의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을 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대륙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아쇼카가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 피우게 된다. 하지만, 이 후, 불교문화는 너무도 찬란했기에 그 불꽃을 금방 소멸한 채, 기원 후 300년경에 두 번째 통일 왕조인 굽타 왕조에 의해서 통합된 힌두교가 인도인의 정신적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솔로몬에 의해서 유대의 성전이 건립되고, 유대교 통합이 이루어지자마자, 유대 12지파의 분열과 바빌론의 유수를 시작으로 2500년 동안의 유랑생활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가 인도인의 정신적 통합을 가져오자마자, 서방에서 아라비아 해와 이란 고원을 넘어 이슬람 정복자들이 코란을 들고 물밀듯이 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유대인은 그 삶의 터전마저 잃어버린 것에  비해, 인도인들은 그 삶의 터전 뿐 만아니라, 정신적인 터전도 함께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의 마지막 이슬람 정복 왕조인 무굴왕조는 나름대로 현명한 군주들을 배출한 왕조였다는 것이다. 무굴왕조는 징기즈칸의 화신이라 주장하는 절름발이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에 의해서 1530년경에 건립된 후, 1858년에 세포이 반란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기 직전까지 델리의 권좌를 누리게 된다.


약간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난 여기서, 오스만 제국(1299∼1922)과 무굴왕조(1526∼1857)그리고 청나라(1636∼1912) 의 그 비슷한 탄생과 성장 그리고 종말에 대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드 2세의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빈 공성전을 끝으로 쇠퇴하기 까지 100년 동안의 전성기를 누린다. 무굴제국의 위대한 통치자 아크바르(1556-1605)로부터 시작된 전성기는 1650년대 샤 자한의 타지마할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청나라는 저 유명한 강희제와 옹전제와 견륭제에 이르는 1660년대부터 약 100년간의 전성기 동안 명나라 때 보다 4배나 많은 영토 확장과 함께 찬란한 문명을 꽃 피우게 된다. 100년간의 시차를 두고, 아랍, 인도, 중국에서 릴레이 하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오스만, 무굴, 청 제국이 19세기가 접어들면서 너무도 허무하게 서구 열강에 의해서 늙은 병자의 취급을 받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한, 너무나 큰 덩치 때문이었던지  이스탐플과 델리와 베이징에서는 자기 살이 썩어가고 있는데도 왜 그 아픔마저 느끼지 못했을까? 정말 역사가 만들어 놓은 드라마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1858년 세포이 폭동이 영국의 승리와 함께 무굴의 막을 내리면서, 영국의 100년간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런 암흑기에도 두 명의 훌륭한 변호사이자, 위대한 지도자인 무슬림의 모하마드 진나와 힌두교도의 마하트라 간디가 있어 미약하나마 인도의 위대한 정신을 세계에 빛내기도 하였지만, “두 나라 이론”에서 시작된 두 종파간의 갈등은 결국 진나로 하여금 파키스탄의 독립을 독촉하게 만들었으며, 종교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면서 무슬림, 시크교, 힌두교를 모두 함께 그의 가슴속에 아우르려고 했던 간디는 1948년 1월30일 뉴델리의 하늘에서 해가 질 무렵, 자신의 종파인 광적 힌두 브라만의 총격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50년 인도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50년동안 38년 동안을 통치한 네루 가문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다. 인도 최초의 수상이며,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 준 <세계사 편력>의 저자이기도 한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현대사에서 간디 다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뒤를 이여 17년간 수상직을 맡았던 딸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에게 저격당하면서 그녀의 업적위에 순교라는 훈장을 더 달게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 역시 5년간의 통치동안 나름대로 성실함을 보였다. 네루의 아버지이자 식민통치하의 초창기 국민회의 의장이었던  모틸랄 네루부터 친다면 근 80년 가까이 인도의 실질적인 지도적 집안인 네루 가문은 진정으로 인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만큼 인도의 독립과 민족적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하지만 네루는 너무도 완벽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이상주의적 사회주의를 척박한 인도라는 땅위에 뿌리 내리지 못하였으며, 인디라 간디는 장기간의 집권에 따른 권력 집착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네루와 인디라 간디는 현대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현재에도 대부분의 인도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위대한 지도자를 둔 인도는 독립한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연간 국민소득 천 달러도 되지 않는 가난한 나라로 머물고 있을까? 그들은 수천 년 전에 비해 큰 차이가 없는 지금의 모습을 인식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인식하고 있는데도, 지금 현재의 가난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그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기준이 잘 못된 것일까? 아니, 그러는 우리는 가난하지 않고 행복한 것인가? 이런 물음들이 더욱 나를 인도로 끌고 간다. 


이 책은 이런 역사적인 서술이외에도 신화, 종교, 철학, 문화, 사회, 과학 등의 각 분야에 대해 차분한 관찰을 해 나가고 있다. 저자 자신의 견해를 최대한 억제한 채, 행간에 흘러드는 인도에 대한 각 분야의 애정이 담겨있다.


애초에 인도라는 말은 강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인도에서 강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자와할랄 네루는 자신의 유언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한다.

“ 나는 단지 한 줌의 재로 변한 내 육신이 아무런 종교적 의미도 지니지 않은 채, 알라하바드의 갠지스 강에 뿌려지기를 원할 뿐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알라하바드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의 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특히 인도의 강이며, 인도의 장구한 문화와 문명의 상징인 갠지스 강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항상 같은 모습으로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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