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가 끝났다.

한주가 끝나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거의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개그콘서트의 엔딩음악이 아닐까 생각한다. 똑같은 개그패턴, 못생긴 얼굴로 웃기거나 이상한 표정을 지어서 웃기는 저질개그, 몸으로 웃기는 개그, 딱히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요일이 지나가는 이때에는 기계처럼 KBS2를 튼다. 반사작용 이라고 해야할까. 무조건반사는 정말로 무섭다.

지훈은 리모컨을 들고 영화를 24시간 방영하는 케이블체널을 틀었다. 올해 들어 몇 편의 영화를 봤을까, 꽤나 많은 양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 가볍게 두 편은 보고 있으니 3년이면 이천 개는 넘게 보지 않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유진이 방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는게 나았으려나.’

지훈은 사귀기 5년도 넘어가는 여자 친구인 유진을 생각했다. 그녀와 만난 것은 대학교 캠퍼스, 세간에서 말하는 CC커플이었다. 처음 사귀었을 때는 어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손 하나 잡는 게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제는 기계적으로 휴일에 만나서 종로의 호프집이나 바, 괜찮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는 지훈의 집에 가거나 유진의집, 모텔에 가서 섹스를 하고는 다음 주에 또 봐 라고 인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사랑,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냥 사귀고 있는 사이니까 만나는 거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번 주에는 왠지 혼자 집에서 편히 쉬고 싶어서 일요일에도 일이 있다고 약속을 깨버렸지만 그래도 이렇게 심심할 바에는 유진을 만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책상 옆에 있는 컴퓨터로 다가가 전원을 켰다. 몇 초 후 화면에 나오는 윈도우화면, 그리고 혼자밖에 쓰지 않아 복잡한 바탕화면이 나왔다. 그리고는 자동으로 뜬 네이트온의 화면에 자신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는 로그인했다.

ㅡ이름: 우종호

내용: 오랜만이네, 요새 안 들어오고 뭐했냐? 아무리 졸업한지 오래됐다고 해도 연락은 하고 살자 야, 다음 주에 술이나 한잔 할래?

대학시절 동기인 종호다. 딱히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동아리 활동이나 취업이나 여러모로 같이 고생한 녀석이다. 오랜만에 접속해보니 한동안 안 보이는 이 녀석도 접속해있고, 여태 쌓인 이야기를 하면 잘 때 까지는 심심하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다.

ㅡ어 나야 잘 지내지, 너는 어떠냐? 직장생활은 할 만하냐?

ㅡ그냥 그렇지 뭐, 치이고 치이고 또 치이고 상사한테 욕먹고 몰래 인터넷이나 하다가 퇴근하는 일상의 반복이지, 대학 때는 이런 일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한다고 했는데 결국은 이 모양 이 꼴이지 뭐.

ㅡ누구는 안그렇냐. 나도 이런 일 정말로 하기 싫었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이 나이까지 돼서 취업 못해서 부모님한테 용돈 받으며 살 수는 없는 거니까.

ㅡ뭐 그렇지, 너나 나나 참 고생이다 야.

ㅡ그러게 말이다.

오랜만에 친구들이라고 말하는 건 직장이야기, 술 이야기 밖에는 없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과 이야기 하면서 단 한 번도 이 패턴이 바뀐 적이 없다. 서로 직장에 치인다는 소리겠지. 그리고 젊었을 때 열정은 젊었을 때뿐이니까. 이렇게 될 수밖에는…….

지훈은 냉장고에서 먹고 자려고 했던 500CC 맥주와 말린 오징어를 꺼냈다. 그리고 모니터 앞에 두고는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 시원하다. 앞으로 계속되는 6일을 버티려면 이게 최고다.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6일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느낌이다.

계속되는 이야기에 시간 지나가는 줄 몰랐다. 잠깐 고개를 돌려 시간을 보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심심할 땐 정말로 안가면서 이럴 때만큼은 정말로 빨리 지나간다.

ㅡ그래서, 유정인가? 걔랑은 아직도 사귀고 있냐?

ㅡ남의 이름 함부로 개명시키지 마라, 유정이가 아니고 유진이다. 그리고 뭐, 그렇지 아직까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사귀는 느낌이 안 든다고 해야 할까.

ㅡ하하, 이나이되면 그렇지 뭐. 사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그런 건 다 대학 졸업하면 땡이라고, 남는 건 일밖에 없으니까. 다들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고.

ㅡ그러냐……. 하긴 그럴지도.

지훈은 종호의 생각에 동감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까먹었다. 어떻게 두근거렸지? 어떤 마음이었지? 아무리 생각해 내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월이고 나이일까…….

ㅡ야, 난 내일 출근해야 돼서 자야겠다. 다음에 시간 나면 술이라도 먹자.

ㅡ그래 술 좋지, 연락해라.

우종호 님이 로그아웃 하셨습니다.

당연히 지켜지지 않을 남자에 입에 붙은 약속을 하고는 종호는 로그아웃했다. 한국 남자들이란 다 이렇지. 지훈은 마지막 한 모금 남은 맥주를 들이켜고 반 정도 남은 오징어를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후……. 어쩔 수 없나, 이것이 세월 이라는 걸까. 종호의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사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그런 건 대학 졸업하면 다 땡이라고. 참 정곡을 찌른다. 가슴을 넘어서 뼈까지 시리게 하는 한마디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 그렇다. 정말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 좋아한다는 것. 사귄다는 것.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은 그렇게 생각된다. 이것이 세월이라는 것이니까. 이것이 30년이라는 세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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