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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평점 :
티피는 색이 풍부한 사람이다. 옷장 가득 채우고 있는 옷들도 그렇고 그가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표정과 감정 또한 그렇다. 가진 색깔이 다채롭고 밝은 사람.
리언은 그에 비해 단조롭다. 티피가 가진 팔레트 색상 가짓수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깊은 색조의 사람이다. 사려깊고 조심성 있는 사람.
그런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여기저기 많이 있다. 아 또 서로 달라? 근데 그게 또 재밌다ㅋㅋㅋ 클리셰는 클래식이거든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재미있는 지점이 있는데, 공간을 공유하게 된 두 사람이 만나서 (아니 책의 절반 정도는 못 만나서) 메모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이다. 얼굴도 모르는 채로 (아니 티피는 사실 페북으로 리언을 보긴 했다ㅋㅋ) 천천히 글을 나누고 생활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색깔을 나누고 사랑에 빠진다.
글은 참 좋다. 말실수를 할 일이 없거든. 물론 글로도 충분히 실수 할 수는 있지만 아무튼 말로 내뱉고 후회하는 건 진짜 한순간인데 글은 내게 주어진 시간이 있어서 조금 더 찬찬히 생각할 수 있다. 상대의 호흡소리에도, 말이 없는 그 순간에도 상대의 감정에, 생각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또는 지레 겁먹는) 섬세한 성정의 리언에게는 그래서 이렇게 글로 티피와 마음을 쌓아가는 것이 더욱 유효했던 것 같다. 그리고 티피는 글에서도 그만의 유쾌한 매력이 잘 묻어나서 더더욱. 어쩌면 처음부터 대면하고 말을 나누고 집을 공유했다면 싸웠을지도 모르겠다ㅋㅋ 생각해보면 처음 티피에 대한 리언의 생각도 그리 호감은 아니었으니ㅋㅋ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사람과 친해지는데 필요한건 역시 맛있는 음식이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 리언은 티피가 만든 달콤하고 맛있는 케이크를 몇 번 먹고 난 뒤 친밀함으로 메모에 x를 표했으니까! (뭐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이긴 했지만ㅋㅋ) 편안한 공간 (리언의 집, 티피의 빈백) 맛있는 음식 (티피의 케이크, 리언의 버섯 스트로가노프) 은 언제 어디서도 변함없는 진리다.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 여러분, 맛있는 음식을 함께 드십시다!ㅋㅋ
이야기는 티피의 시점과 리언의 시점이 교차되어 서술되면서 진행되는데, 어떻게 보면 티피와 리언이 각자 내게 보내는 자신들의 메모인 것도 같다. 서로 나눴던 메모들, 이야기들을 또다시 내게 해주는 메모, 이야기. (조금 다르지만) 액자식 구성이랄까. 메모식 구성이라 치자ㅋㅋ 이런 식의 시점 교차 구성은 정말 재미있다. 티피와 리언의 입장이 어땠는지 어떤 마음인지 조금 후에 보게 된다는 거. ‘아 그래서 넌 어땠어?’ ‘잠깐만 좀 이따 말해줄게’ 소곤소곤 나누는 기분이 들어서 더 설렌다. 형식까지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는 것.
근데 정말 작가의 긴장감 조절은 탁월한 것 같다. 어떤 이유로 못/안 만나던 사람들이 막상 만나게 되면 긴장이 탁 풀려서 아, 차라리 둘이 안 만났으면 더 재밌었겠다.. 싶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 소설은 만나기 전도 재밌고 만난 후로도 재밌다. 특히 메모. 티피와 리언이 쓰는 서로에게 쓰는 메모가 좋아서 혹시나 만난 이후로는 쓰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글도 말도 적절하다. 그런 점도 텐션 유지에 한몫 했을지도.
그래서 그런가 페이지가 계속 넘어간다. 전자책이랑 종이책 둘 다 보는데 보통 종이책은 집에서 밝은 동안에 정자세로 본다. 무거우니까. 그런데 계속 보고 싶어서 오가는 길에도 보고 자기 전에 누워서도 봤다. 누워서 보는게 왜? 싶을 수도 있는데 엎드리는 건 허리가 아파서 못 해서 바로 누워서 책을 들고 보는건 정말 팔이 아파서 웬만하면 하지 않거든. 그리고 내 나름의 (종이책 기준) 재미 척도가 있는데 그 중 최고는 버스 안에서 책 읽기다. 이상하게 전자책은 멀미가 거의 안 나는데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종이책은 백프로 멀미다. 그럴걸 알면서도, 나중에 후회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해 읽는 책이 있는데 그런 책이 제일 최고 재미 레벨인 것이다. 몇 권 없었는데 이 책이 그걸 해내네! 뭐니뭐니 해도 역시 소설은 재밌는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흥미 위주의 나에겐 그러니까 이 책은 별 다섯개다ㅋㅋ
근데 마냥 재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묵직한 이야기들도 나온다. 사실 가스라이팅에 대해 굉장히 얕게만 알았던 터라 그냥 세뇌..? 뭐 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 책으로 많이 알게 되었다. 이 정도의 정서적 학대구나, 싶은 거였다. 티피가 결국 그 학대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응원하게 되고 계속해서 몰입할 수 밖에 없다. 아, 티피의 친구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티피를 적극 지지하고 응원하면서도 티피가 스스로 할 수 있게 기다려주기도 한다. 물론 리언과 리치도. 결국 티피가 좋은 사람이니까 주위 친구들도 좋은 사람들이 모인 거였겠지? 생각하면 나까지 기분 좋아진다. 아 그래, 티피는 주위를 기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긴데, 가끔 책을 읽다가 몰입이 잘 안 될 때는 이 책이 영상화가 된다면 어떤 배우가 좋을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가상캐스팅을 하고 대입해서 보면 읽는게 한결 수월해져서이다. 그런데 또 가끔은 일부러 찾아서 생각해보는 게 아니라 탁! 떠오를 때가 있는데 리언이 그랬다. (이 책은 몰입이 안 될 때가 없었다ㅋㅋ) 아무튼 리언에 대한 묘사에서 바로 ‘에이단 터너’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키가 크다는 티피보다도 조금 더 크다는 부분에서는 조금 멈칫했다. 다른게 아니라 영화 <호빗>에서 호빗을 맡았던 배우들은 키가 잘 가늠이 안 되어서ㅋㅋ 근데 어쩌나 이미 머릿속에 딱 떠올라 박혀버린걸.. 다 읽고나서야 파란창에 배우 이름을 검색해보니 프로필 상으로 180센티란다. 다행이다(?) 아 그런데 마침 아일랜드 출신이라고! 오 좋은데?! (나홀로 캐스팅)
영화화 된다는 얘기를 아직 들은 적은 없지만 (안 찾아봐서 사실 모름) 영화화 되면 좋겠다 생각이 든다. 일단 이야기가 재밌으니까ㅋㅋ 왠지 티피는 포스트잇도 각양각색의 제품을 쓸 것 같긴 한데, 리언과 집에서 나눈 메모는 어쩐지 노랑색일 것 같다. 나 자신은 캐릭터 제품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쓰는 편이지만 역시 품질은 3M이 최고 아니겠나. 왠지 리언은 집에 쓰리엠 뒀을 것 같아서ㅋㅋㅋ 그리고 색은 짙은 노랑색. 시중에 나온 그 노란 쓰리엠보다는 좀 더 노랗게. 마치 치자물처럼..ㅋㅋㅋ 흐릿한 색으로 벽을 채우기에는 티피와 리언의 얘기는 더욱 생생하니까!
나도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이야기였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이니 오랜만에 예쁜 엽서 한 장 보내는 것도 좋겠다. 다들 자기만의 재밌고 설레는 이야기를 찾게 되는 연말이 되었으면 한다. 이번에 나에겐 그게 <셰어하우스> 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