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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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이슈로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외할머니가 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너는 저런 데 가지 마라." 


그것은 평화시위였고 다행이도 그렇게 우려할만 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옛세대라서, 그러니까 1번을 찍던 어른들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그때 광화문으로 갔고, 이런 상황에서 앞서 움직이고 따라간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과 같이 살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렸을 땐 '착한 사람들'과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어른 여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부분 나왔던 이야기들인 것 같다. 누구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다 퍼다주느라 집에선 가장노릇, 아버지 노릇에 최악이었다고. 정의롭게 살다가 회사에서 짤려서 그의 아내만 고생이라고. 나는 정의로운 사람과 최악의 가장, 그 간극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만약에 저기 거론되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상상하면서.


<진주>는 늘 있어왔던 역사의 어두운 부분에서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던 작가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과거 이야기이면서 지금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소설이었고 매우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이야기였다. 


소설의 앞부분에 박정희의 죽음 뒤에 벌어진 사건들을 서술하는 부분에는 눈에 그려질 듯 상세한 묘사와 함께 자료사진이 실려있다. 그때, 울던 사람들이 아직 여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은 부끄럽게 기억해 떠올리고싶지 않을테고, 몇몇은 아직까지 그 마음 변하지 않았을테다. 우리는 길지도 않은 30년 정도의 시간을 통과해 각자 변한 모습으로 서있다. 


그 변두리를 통과해낸 사람들과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믿음이 어떤 것이기에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까. 어떤 철학자는 내가 의심하고 있는 것 까지도 의심해야한다고 했었는데, 이들은 어떤 계기로 굳은 믿음에 이끌려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까. 그리고 그건 당연히 눈 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희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소설가 최은영의 인터뷰 중엔 그런 말이 있었다. '선천적으로 마음이 약한 사람이 있다'고. 심장이 약하듯, 무릎이 약하듯 선천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리고 '운동'했던, '행동'하는 그들이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다는 마음. 


그래서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유추해 시스템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믿음. 그렇다면 반대편 사람들의 믿음은 뭐였을까.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많이 들어왔다.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그것들이 한끗 차이에 지나지 않다는 것. 나치 전범이던 그들 일부는 가정에선 따뜻하고 올곧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대의에 충실한 사람. 하지만 가끔은 불쌍한 이들에게 동전을,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믿음의 차이는 뭘까?


이 미묘한 뒤집힘과 간극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진주의> 장혜령작가가 그랬듯, 우리가 그렇듯. 옳은 것과 그랬어야하는 것은 늘 같지 않다. 진주는 그 사이에 있는 장소와 사람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고 이 간극을 겪는 사람들에게 어떤 연대와 손길을 내미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하겠냐며 날카롭게 묻는 대신, '이런 이들이 있었고 저런 이들이 있었다'고.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를 기억하되 그들의 곁에 살던 사람도 기억하자고 부드럽게 에두른다.


'거시사'와 '미시사'라는 말이 있다. 거시사는 박정희가 죽고 박근혜가 탄핵당한 것일테고, 미시사는 소설 속 진주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이제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 그러니까 자신이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세상 속으로 힘겹게 다시 들어가는 것일테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보면서 '거시사'와 '미시사'라는 단어늬 무게 차이를 다시 생각한다. 이 소설에 담긴 '미시사'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비슷한 과정을 겪은 '운동하는 사람'의 2세들이 많기 때문일테고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그에서 파생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진주>는 시대의 대표성을 띈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감옥이 있는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웃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줄넘기와 자전거를 배울 것이다. 물대포를 쏘던 광장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스케이트를 타고 풍선을 날린다. 이 간극 속에서 <진주>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공감가는 이야기가 되었다. 작가 자신의 삶과 자신 이전의 삶을 천천히 펼쳐낸 고된 그녀의 작업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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