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꽤 오랜 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사람이 있었다. 아주 잠시지만 애인 비슷한 친구였다. 그런 모호한 관계는 얼마 못 가서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그 친구를 보던 날, 나는 관계의 회복을 바라며 설득했다. 애원할 준비를 마친 나에게 그는 말했다.

우리가, 뭐 그렇게 특별한 게 있었나?”

잔인한 문장은 뉘앙스와 어조, 그 높낮이가 덤덤할수록 날카롭다. 특별할 게 없는 관계. 그 한마디로 요약되어버린 나와 그 친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친구와 함께해서 내게는 매순간 특별했던 모든 것들이 단번에 간편하고 쉬운 어떤 것으로 전도되었다. 간절했던 만큼 특별했던 기억들은 이미 끝나버린 관계의 덫이 되어 자꾸 달콤했던 순간으로 구간반복시켰다. 자동으로 되감기 되는 기억의 파편은 언젠가부터 앞뒤 순서와 맥락도 없이 내 머리속을 헤집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에서 익사할 때 즈음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지난 순간들이 내게 낭만으로 기록되어 낭만 그 자체로 소비되며 사계절이 지나도록 매일 같은 순간을 되씹고 있는 것을 작가 반스가 지켜봤다면 그는 내게 무어라 말했을까. 아마도 손목 안쪽으로 돌려 찬 손목시계를 보여주며 그 순간들에 대한 낭만은 너만의 은밀하고도 사적인 시간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었던 그 친구의 눈빛,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던 말 한마디까지 모두 특별하게기억된 것들이 실로 자기 기만과 망상적 허구일 수 있음을 설파하면서 말이다.

토니가 스스로 썼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편지와 토니가 기억하지는 못하나 실제로쓴 편지 사이의 간극은 우리 관계가 특별하지 않았다는 그 친구의 말과 그 동안 믿었던 내 기억 사이의 간극과 같다. 실로 농담처럼 던진 그 친구의 눈빛과 제스처들을 시간의 우연성 속에서 따뜻하게 기억하고, 이후 그 기억은 두터운 살을 덧대어 특별한 존재로 남았다. 한번씩 기억의 회로를 타고 회고될 때마다 내가 부여한 진정성과 강렬한 주관적 느낌이 더해졌다.

나와 공유했던 모든 순간들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언행에 담긴 감정의 무게는 얼만큼이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실 중요 하지도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한 명은 돌이키고 싶다고 말하는 기억에 대해 다른 한 명은 결코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미 과거형이 되어버린 순간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군데군데 좀 먹히듯 소멸되기를 기다리거나 이리저리 구겨져 왜곡된다.

토니와 나의 공통점은 스스로 진실이라고 위장한 기억을 통해 알량한 평화를 얻었다가 단박에 그것을 거두어 버린 진실의 비수에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다는 점이다. 개인의 역사에 필연적으로 부여된 우연성과 왜곡이 언제나 내 삶에 편리하고 유리하게 구성되는 플롯임을 잔인하고 비참하게 깨달은 것이다.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짜깁기 된 기억에 차츰 점거 당하며 자기 기만으로 점철된 사람이 되는 것. 승자도 패자도 아닌살아남은 자가 되어 삶을 교묘하고 윤색하게 각색하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한 평생 살아온 토니를 보며 우리 모두는 불안하고, 불편하다. 곧 저렇게 늙을 내 앞날이 눈앞에 아른거려 불안하고, 삶이 늘 그러하듯 예기치 못한 편지가 평균치의 삶을 살아온 내 인생을 뒤집을까 두렵다.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토니로부터 반사된 내 자신의 삶과 독대한다. 책을 쥔 내내 불안하고, 두렵고, 불안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지만 어느 순간 토니의 얼굴로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만 다행인 것은 죽는 순간까지 교묘하고 윤색하게 변명할 내 삶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성찰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간절한 관계가 뒤틀리고 과거로의 회귀가 완전히 불가능할 때 삶에 대한 총체적인 무력감과 덧없음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면서 다시 마주한 존재가 반스의 책이라는 것은 불행 중 축복이었다. 토니는 노인이 되어 회한의 감정에 젖으며 삶을 반추하지만 나는 이십대의 끝자락에서 그간 길지 않은 내 삶을 되돌아보았다. 토니에게 갑자기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있다면, 내게는 지나간 인연의 말로에서 불쑥 던져진 질문이 있다. 그 질문 하나로 나는 나의 지난 시간과 기억, 그리고 그것들을 주관적으로 기록한 일기장을 조금 거리화해서 볼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다 한들 필연적으로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개인의 역사를 스스로 투명하고 진실되게 기록 할리는 없다. 더욱이 젊지 않음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인 이들이 느끼는 회한의 감정에 물들기에는 이십대인 나는 충분히 젊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 내 인생에 대해 교묘하고 윤색하게 꾸며내 이야기한다면 그것에 반기를 들 주변 사람들도 아직 너무 많다.

이십대 막바지의 어느 순간, 나는 나의 모험심이 졸아들어버린 지 오래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소년기에 꿈꾼 것 중 단 하나라도 실행에 옮길 날은 오지 않을 거였다. 대신, 나는 잔디를 깎았고, 휴가를 냈고, 나름대로 인생을 즐겼다. (…)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십대의 막바지, 정말이지 서른을 두어 달 남짓 남겨둔 내게 불현듯 꽂힌 이 구절은 한 동안 내 머리를 돌아다녔다. 비참한 무탈함, 비겁한 안도감.. 그런 것들이 뒤섞인 무력감을 회한이라고 말한다면 반스가 말한 그것을 젊은 나도 비슷하게 느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앞을 내다보고, 그러고 나서 그 미래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시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정을 익히는 것. 예를 들면, 우리의 삶을 지켜봐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결정적이고 그렇게도 역겹던 몇 살 되지도 않는 나이차가 점차 풍화되어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젊지 않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일괄 통합된다.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회한의 감정.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붙어버린 원시적인 감정이다. 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 개선의 여지조차 없는 감정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