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세기가 지나도 싱싱했다 : 오늘의 시인 13인 앤솔러지 시집 - 교유서가 시인선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공광규 외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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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_

경기문화재단 선정작을 읽게 된 이유는 사실 이 앤솔로지 시집 때문이었다. 권민정, 김이듬, 김상혁 이 세 사람의 시인을 좋아해서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덤으로 전영관 시인의 등단 시인 바람의 전입신고를 매우 좋아해서 필사도 했던 시였다. 이런 시인들이 모여서 앤솔로지 시집을 낸다는데 필히 봐줘야지, 암, 당연히 봐야지. 이런 마음으로 펼쳐든 시집이었다.

죽음과 일상, 글과 단어, 운명과 관상, 어머니와 역서의 흔적, 지구, 코로나까지 다양한 글들이 머문다. 운율 위에 얹어진 문장들이 너무 아름답고 예뻐서 사무치는 다양한 감정들이 너무 영롱해서 일찍이 읽은 시집의 후기를 미루고, 미룬다. 적고 나면 퇴색될까 봐 그 마음들을 두고두고 또 꺼내보려고.

시인들의 연령, 소재, 이야기, 모든 것이 다 달라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면 시인이 될 수 있는지(이건 시집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다만 띠지에 적힌 싱싱한 언어라는 표현에 웃었다. 어떻게 해야 싱싱한 언어라 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이야기다. 코로나로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고 내 이웃의 이야기이다. 부디 이 아름다운 은유를 함께해 주길 바란다.

02_

나는 오늘 메모를 지우다 내 미래를 지울 뻔했다

네가 갈겨놓은 그림 속에서 네 무의식을 읽을 수 있구나

불안과 트라우마가 가득하구나

스트레스를 줄이라니 가혹하지

이따위 쉬운 말

권민경, 낙서금지 중에서

지인이 권민경 시인의 시는 낙서가 예술이 된 케이스 같다고 말했다. 주절거리는 문장들 속에 보석이 박혀 있는 것 같다. 역시 권민경답다 싶은 글들이다. 

당신은 새와 고양이와 행인의 길을 한없이 이어가는 빛이랍니다 그런 당신에게 우리 모두 반했으며 또한 그런 빛과 어쩔 수 없이 싸우는 중이랍니다

김상혁 유리인간 중에서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이후 내 마음의 픽은 김상혁이다. 인간 냄새나는 시가 좋다. 김상혁 시인의 시가 그렇다. 시인이 마구마구 시를, 글을 써줬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나는 어느 시기일까, 삶이 부끄러울 때마다

대책 없이 야위어

숨어 있을 그늘 끌어당길 때마다

낡은 수레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구름을 찢고

공중에서

김안, 대설 중에서

겨울에는 겨울의 소리가 있고 겨울의 언어가 있으므로,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김안, 喫茶去 중에서

앤솔로지 시집에서 처음 만난 시인 김안, 모든 시들이 인생의 가장 추운 겨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인의 삶은 인생 어디쯤을 가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喫茶去(끽다거 - 차나 한잔 마시고 가)란 시가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끽다거의 뜻과 고사를 읽고 시를 읽으니 더 좋았다. 

이 사각은 너무 부드럽고 탄력적이다

그로기 상태의 상대 같은 구석은 아늑하다

몰리는 일, 한없이 쓰러지고 싶은 곳

얼굴에 빗방울을 받고 싶은 그곳

김철, 링 중에서

반짝이는 재치와 문장을 보았다. '몇 세기가 지나도 싱싱했다'에서 찾은 보석 중의 보석은 김철 시인이다. 대체 이런 시인이 어디 있다 나타났지. 시를 읽는 내내 광대가 승천한다. 눈꼬리가 움찔한다.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라 그런지 삶과 노동에 대한 애환과 애정이 깊다.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꽃은 지는데 사람이 더디 온다는 몸부림을

꽃샘바람이라 한다

곁이 비었는데도 울렁거리는 까닭을

환생이라 한다

전영관, 환생들 중에서

바람의 전입신고 이후 오랜만에 다시 만난 전영관 시인의 시. 여전하다. 반갑고 그립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변한 것이 없어서 혹은 그 변함이 깊어서 더 좋다.

허울을 알기 위해 허울이 되어야 합니다

책임이 경계 밖으로 시선을 배출할 수 있도록

정민식, 관성 중에서

정만식 시인은 문장을 너무 아름답게 예쁘게 쓴다. 너무 예뻐서 위화감이 드는 문장에 이력을 보게 된다. 2020년에 등단한 시인이었다. 시인의 시에 삶이 더 깃들면 어떤 문장을 만들어주려나~ 기대가 되는 시인을 만났다.

하고 싶은 말 대신 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

들리는 대로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만

당신은 언제나 들리는 만큼의 당신입니다

정민식, 어린 나의 외국어 중에서

03_

내가 쓴 포스팅을 보고 시집을 구매했는데, 쓴 내용을 찾지 못해서 다른 책을 산 줄 알았다고 지인이 말했다. 속은 기분이라고. 흘러가는 시선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읽다 보면 그 안에서 문장들이 떠오를 것이라 말했다. 인생 그 어떤 달콤한 말을 하는 친구보다 좋은 인연이 될 것이라 말했다. 정 원치 않으면 책은 내가 갖겠다 말했는데, 이후 소식이 없다. 인생 친구를 찾았을까.

정말 우리는 아는 만큼 읽고, 읽을 수 있을 만큼 느낀다. 그래서 이 어려운 단어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암호 해독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이들 물어 온다. 시의 의미를 모를 때 어쩌면 좋으냐고. 그냥 제껴.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그 뜻을 알고 깊어지는 글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수 십 편이 실린 시집을 읽으며 그 뜻 하나하나를 다 찾으며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다음엔 시집을 펼치기도 싫어질 테니.

그저 손 닿는 가까운 자리에 두고 수시로 만져주길 바란다. 시간을 내어 정독하란 뜻이 아니다. 자기 전 십 분, 삼 십분, 삶의 틈 바구니에서 시집을 뒤적이다 보면 맘이 닿는 문장들이 가슴을 칠 것이다. 그 페이지마다 라인 테이프를 붙여 두어도 좋다. 어느 순간 페이지 페이지마다 빽빽하게 박힌 색색들을 보며 놀라는 순간이 올테니. 굳이 내가 권하지 않아도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그래서 시집을 읽을 땐 보석을 발굴하는 느낌으로 보라 말하지 않던가. 

우리 가장 가까운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어, 지금을 이야기하고 있어 더 싱싱한 문장들. 싱그러운 이야기를 만났다. '몇 세기가 지나도 싱싱했다' 이 제목은 편집자의 바람이 아닐까. 예술이란 백 년이란 시간을 뛰어 넘어 살아남는 것이니. 이 싱싱함이 부디 백 년을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주길 그때도 그 빛을 잃지 않은 채 빛나주길. 그래서 문학사 한 자리에 오롯이 이름을 남겨주길 바랄 뿐이다.

https://blog.naver.com/sayistory/223020897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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