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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 내가 눈 먼 자들의 도시에 살게 된다면 나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홀로 눈 뜬채 목도해야 하는 유일한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모든 걸 맡겨버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눈 먼자 중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빨리 소리쳐 빠져나오고 싶은 꿈처럼 주제 사라마구의 초현실적 리얼리즘은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 내려가기가 버거웠다. 소설 속 세계가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라는 철학적인 명제 근처를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면, 나는 '볼 수 있는 제한적인 시간 속에 나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속에 아주 자주 책을 덮었다. 당장 내일 눈이 멀게 될 운명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 책은 읽고 싶지 않았다. 보다 희망적이고, 비끼어 가는 빛이 얼굴을 수줍게 간지럽힐 것 같은 따스함이 묻어나는 책을 그 마지막 시간에 읽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보는 것을 주제로 삼아 수많은 것들을 나열했지만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은 우울한 책으로 남았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관점에서는 실패한 작품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윽고 의사의 아내는 계속 장님인 척하는 것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설사 전에는 있었다 해도, 지금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실명은 또 이런 것, 모든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p296)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 멀지 않은 자의 희생은 여전히 희망적이다. 실명이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단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눈뜨고 있는 자,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드는 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대단히 희망적이다. 그리고 어느덧 그 희망과 따스함은 보지 못하는 눈 먼 이들에게까지 잔잔히 스며들지 않는가? 두 손을 맞잡거나 한 줄로 이어지는 인간 띠 속에서 어떠한 인간을 짓밟는 탄환도,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폭력도 희화된 코메디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특별히 눈먼 깡패들이 있는 병실과 대치되던 장면에서는 어떤 고결함까지도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수없이 갈무리해 둔 많은 문장들을 뒤로 하고 기억이 나는 한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세 여성의 베란다에서의 비 샤워 Scene이다. 그 장면을 읽어내려갈 때는 악취나는 눈 먼 자들의 도시 속에서 맨살 위에 살포시 어리우는 비누향이 풍겨나는 것 같았다.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우리 삶 속에 느껴지는 향기에 이르기까지 공감각적인 심상을 상당히 은유적으로, 만연체의 방식을 빌어 구현해 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의 눈은 늘 영혼을 담을 수 없을지라도, 나의 귀는 늘 누군가에게 향하여 있고, 나의 행동에서는 은은한 비누향이 풍겨지길. 그것이 바로 눈 먼 자들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일 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