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황인숙 지음 / 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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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경북 풍기군 이었다 영주시가 된 이르실이라는 마을. 우리 외가에서 지내곤 했다. 어릴때라고 하기 민망하지는 않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구나.... 슬프게도. 아니 슬프지 않게도.

시골 초가집이던 외가에서는 한여름에도 가마솥에 불을 지펴 삼시세끼를 해결했다. 그런 가옥에서 유일하게 불을 때지 않아도 되는 곳이 중간방이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언제나 중간방이 내 차지. 할무니 미안.

아침 부터 타오르는 하여름 땡볕에 길건너 마을 입구에 큰 나무를 지나서도 산길을 한참을 올라가야 있었던 우리네 밭. 거기서 새벽 밭을 매고 내려오며 손녀딸 손에 쥐어줄 산딸기를 낫으로 가지채 베어 중간방 앞 대청에 무심히 툭 던져 주셨다.

"많이 무라."

시원한 구들방 위에 한지에 기름을 먹여 바닥을 마감한, 종이 냄새 그득한 그 방에서 여름을 났다. 황토 위 초배지를 신문지로 바르고 위에 또 한지를 덧댄 방에서는 닥종이 특유의 향이 여름 풀 내음과 바로 옆 외양간에서 나는 구수한 어미소의 울음과 뒤엉켜 있었다.

그 안에서 할머니가 민망하다 제발 입지 말라는 핫팬츠를 입고 민소매만 간신히 면한 반팔 티셔츠를 펄떡이며 그 산딸기를 송이채 가지에서 하나하나 따먹었다. 더불어 그 옆에는 막내이모가 소중히 모아둔 리더스다이제스트와 정체 모를 잡지들. 그리고 문학잡지들이 페이지를 넘겨가며 내 눈요깃거리 노릇을 해주었다. 그때 노스탤지어를 알게되고, abby에게 혼자 고민상담을 해보고는 했다. (Abby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라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아닐까.)

그때 읽은 수많은 책들이 아마 현재 내 삶을 이어가는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상품이 될 수 없다라는 생각은 이미 저 만치 던져진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황인숙산문집 , 이책만큼은 상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하철 곳곳에 무수히 뿌려지는 무가지 대신 이 책이 여기저기 읽혀진다면 좋겠다. 그럼 어쩜 세상이 한조각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글자하나하나 곱씹어 따스하다.

이십년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처럼 시인의 글이 마음에 들려왔다.


그래. 삶이 다 그렇지. 매순간 #좋은일이아주없는건아니잖아 . 글이 나를 다독인다. 금박음각이 새겨진 표지속 해방촌의 계단. 그리고 계단을 뛰내려오는 길고양이. 1886년부터 살아온 시인의 거주지 해방촌. 치솟아 오르는 임대료에 대한 한탄.

내 어릴 적 하루 6번다니는 버스정류장을 대신하는 정자에 모인 할머니들이 하는 이야기들. 그 덤덤한 일상들이 이 안에 묻어져 배어나온다. 계단 앞 모여앉은 여인들의 뒷수다. 집값이 올라 빌라건물의 주인이 되고 점점 탐욕스러워지는 삶 속에서도 여전히 노쇄하는 몸을 끌고 굳건하게 폐지카트를 미는 할머니의 이야기도 쓰여져있다.

황인숙 시인의 어느날 지인이 선물한 장미향수를 고양이들의 온갖 냄새가 밴 노령의 집사가 반가워하며 손목에 뿌려본다. 그 아기자기한 삶의 열정이 묻어나는 듯한 속지 디자인.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북디자이너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역시나 그림. 디자인. #김선미 라고 쓰여있다. 그말인즉슨 김선미북디자이너가 황인숙시인의 글을 닮은 책을 펴고 싶었는지를 알려주는 문구일 게다.

길고양이를 밥을 챙기며 고양이에 관한 시만 쓰게 되어 독자들도 얼마나 지겨웠을까 한탄하며 새로운 글감을 떠오르게 한 원고작업에 대한 환호도 잠시.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 역시 고양이와 지내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 좋아하던 향수도. 반듯하게 갖추어입던 정장도. 과감히 포기하게 할만큼 소중한 생명. 고양이.

환경이 중요하다 외치는 어떤 수많은 글들보다 당장 눈앞에서 배곯고 추위에 떠는 고양이를 보듬는 시인의 산문이 더 빛나는 환경선언으로 들린다.


어줍잖은 공부로 해온 사회학이고, 윤리학이고... 모두 시인의 글 한줄에 아하! 이게 정말 생명존중이구나 머리를 쳤다.

한참 여름 우리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던 나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어느틈에 마치 전봇대 처럼 싹둑 잘려 서있다. 겨울 해가 비치라고 자르는 것이니 인간 위주의 삶에서 보면 이해가 안가지는 않지만, 식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황당할까. 봄부터 애써 키워온 소중한 가지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막대기에서 다시 새순을 피워내야하는 그 입장이 되어본다면. 나라도 외칠것이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식물복지. 조경업자에게뿐아니라 당장 우리집 마당에 무참히 자라고 있는 잡풀에게도 주장해주고 싶다. 한겨울 조만간 모두 불쏘시개로 사라질 터이지만. 난 아직 식물복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현실타협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밤을 꼬박 새우며 이 책을 마저 읽어내린 것은 앞에서 나를 사로잡은 문구 때문이었다.

세르반테스는 "빵만 있으면 어지간한 슬픔은 견딜수 있다"고 나아가 나는 외친다. "빚만 없으면 빵이 없어도 어지간한 슬픔을 견딜 수 있다"고.

통절하게 동감하는 바이다.

한권을 마음놓고 쭈욱 읽은 후 나의 기분은

다시 외가의 중간방에서 뒹굴던 소녀가 된 기분이다. 거기 누워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조곤조곤한 잔소리들과 할아버지가 무심코 던져주듯 넣어주는 산머루를 함께 나누는 그리운 마음.

고양이와 비둘기를 같이 밥을 주지 못해 마음아파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산골짜기 외딴집 살이를 고집하고 있는 지금 가장 고민스러운게 아침마다 마주하는 로드킬의 흔적인 내가.

그 선명한 삶의 마지막 흔적들에 더이상 무덤덤해지지 않을 명분을 얻고 간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주셔서.

애정합니다. 고양이들을 위한 캣맘으로 살아주셔서.

존경합니다. 내가 못하는 행동을 실천으로 옮겨주셔서.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역시 열심히 책을 팔아 고양이 사료값으로 인세가 더 들어가기를 돕겠다 인건. 역시 나의 한계이자 본분이겠지.

공동체적인 삶을 운운하며 감성팔이로 일관하는 책에 질린다면.

잔잔히, 평온히. 공존의 삶을 옆에서 살포시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이 도서를 집어드는 데에 들인 수고와 금전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결과를 줄것이다.

내놓고 함께 살아라보다

나는 이렇게 함께 살고있다

라고 시인의 글이 보인다.

잔소리대신 감성. 이라고 외치는 이 책을 연말 고객들 가방속 애장도서가 되어 주길 기원해본다.

그로인해 스치듯 지나는 모든 이들이 나와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누구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황인숙 산문집을 읽은 보람이 있지 않을까.

#달출판사 로 부터 무상제공 받은 도서를 일고 이 글을 쓰고 나니. 다시 서점으로 달려가 여러 권을 과감히 꺼내들고 나의 사랑하는 벗들에게 한권씩 보내고 싶어졌다. 무상제공 받은 이 도서는 소담서점의 샘플북이자 책방지기의 소장도서목록 상단에 올려놓아야겠다. 어느날 퇴직하고 우리집 마루를 뒹구는 날, 내 손에 다시 쥐어질 터이니까.

사서 볼걸. 후회중입니다.^^;; 길고양이 밥값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어쨌거나 이 책은 출판사로 부터 무상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글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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